세계적인 공급 과잉과 경쟁력 약화라는 난관에 맞닥뜨린 석유화학업계가 정부 지원을 받아 자율적인 구조 조정에 돌입했지만 채권단과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금융 당국은 채권단은 어디까지나 지원자일 뿐이며 석화업계가 먼저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금융위원회는 30일 금융감독원과 은행연합회, 은행 17곳 등과 ‘산업 구조 혁신 지원 금융권 협약식’을 열었다. 이날 행사는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월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핵심 산업 중 하나인 석화업계의 경쟁력을 회복할 대책을 내놓으라”고 발언한 데 따라 주요 석화 기업에 돈을 내줬던 채권단이 금융 지원에 나서는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열렸다.
금융 당국과 채권단은 대출을 연체하지 않은 정상 석화 기업이 주채권 은행에 도와달라는 의사를 밝히면 은행이 자율 협의회를 소집해 해당 기업 사업 재편 계획의 타당성을 점검한 뒤 지원안을 내놓기로 했다. 만기 연장과 금리 인하, 이자 유예 등이다. 협의회에서 채권액 기준 4분의 3 이상의 찬성표가 나오면 산업통상자원부의 승인을 거쳐 사업 재편이 시작된다.
채권단 차원의 지원 준비 작업은 끝났다. 하지만 금융 당국과 채권단은 석화업계의 의지가 부족하다고 보고 있다. 행사를 주재한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석화업계에 대한 시장 의구심을 걷어내고 기업의 의지와 실행력을 확인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사업 재편 그림을 조속히 보여달라”고 말했다. 이어 “금융권은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이제 업계 차례”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현재 석화업계 생산량의 절반 이상은 폴리에틸렌(PE) 등 부가 가치가 낮은 범용 제품이다. 금융 당국과 채권단은 석화업계가 PE의 원료인 에틸렌을 최대 연 370만t 덜 생산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현재 생산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다. 전남 여수와 충남 대산, 울산 등 각 산업단지 내 중복 설비를 통폐합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기업마다 설비의 가치를 얼마로 평가할지, 그에 따라 합작 법인 지분율은 어떻게 구성할지 등이 어렵다는 이유로 논의가 제자리다.
채권단과 석화업계는 특히 ‘자산 건전성 분류 상향 특례’를 두고 갈등을 빚고 있다. 이 특례는 자율 협의회 협약에 따라 금융 지원을 받는 석화 기업이 구조 조정 과정에서 대출 연체 등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더라도 채권 상태를 ‘정상’ 또는 ‘요주의’로 둬 한도를 줄이거나 회수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다. 채권단은 지원 대상 석화 기업 대부분이 각 대기업 그룹에 오랜 기간 큰돈을 벌어다 준 주력 계열사인 만큼 특례를 받으려면 대승적인 설비 통폐합 합의와 증자 등 그룹 차원의 강도 높은 자구책이 뒤따라야 한다고 보고 있다.
한 채권단 관계자는 “각 석화 기업의 대주주는 특례 요건이 너무 깐깐하다고 맞서고 있다”면서 “석화업계가 설비 통폐합 합의와 그룹 차원의 자구책 마련을 머뭇거리다 구조 조정 적기를 놓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진욱 기자 real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