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기상학에서 “브라질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면 텍사스에 토네이도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로 쓰였다. 이 개념이 인문학이나 신학에 적용되면서 “사소해 보이는 변화일지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예상치 못한 아주 큰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뜻으로 전화됐다. 이 나비효과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단순히 행동뿐 아니라 특정 정서와 언어의 전파에도 해당한다. 내가 가진 감정은 언어를 통해 다른 누군가에게 전이되고, 그렇게 전이된 감정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파된다. 이를 전파하는 사람이 언어의 힘을 이용할 줄 아는 정치인이나 혹은 대중운동가이면 그 나비효과는 극대화된다. ‘감정의 나비효과’라 할 것이다.
지금 미국 사회는 감정의 나비효과를 뼈아프게 경험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마가(MAGA) 운동의 지지자요, 미국 보수세력의 미래를 이끌 지도자감으로 주목받던 보수 대중운동가 찰리 커크가 지난 10일(현지시간) 향년 31세의 꽃다운 나이에 유타대학교 캠퍼스에서 연설하던 도중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지난 몇 주간 미국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유력한 방송들은 애도를 표하면서도, 동시에 평소 타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부추긴 커크가 결국 그 혐오의 희생자가 돼 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29일 충격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미시간주의 한 교회에서 총격 사건으로 4명이 사망하고 8명 이상이 상처를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용의자는 교회에 불까지 질렀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서 ‘폭력 유행병’을 반드시 끝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자신이 대통령 후보 때 폭력의 희생자가 될 뻔했으니 그 말은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말이겠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트럼프 대통령 자신 또한 평소에 폭력을 부추기는 듯한 위태로운 언어를 자주 써온 것도 사실이다.
무슨 말인가. 한 사회에 일어나는 반복되는 폭력 사태나 위협은 반드시 그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말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와 감정의 나비효과이다. 정치인을 비롯해 사회의 유력한 지도자가 쓰는 언어는 그래서 무섭고 중요하다. 청중은 그 정치인이 쓰는 언어의 느낌, 뉘앙스, 감정과 정서를 그대로 전달받기 때문이다. 두려움으로 뿜은 연설은 두려움을 청중에게 갖다 주고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처럼 소망으로 한 연설은 소망을 전한다. 불안은 불안을 낳고, 혐오는 혐오를 낳고,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 이렇게 시작된 나비효과는 ‘브라질에서 날갯짓으로 시작돼’ 어느 순간 누군가의 가슴에 전달됐을 때는 이미 ‘폭력의 토네이도’가 돼 있다.
그래서 정치인의 한마디 말은 책임이 큰 것이다. 어디 정치인뿐일까. 사람의 영혼을 책임지는 목사의 말은 더욱 무게감이 막중하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한 말은 비록 서툰 언어일지라도 청중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울려 나게 한다. 반대로 온갖 부정적 에너지로 가득 찬 말은 아무리 종교적 언어로 포장하거나 성경의 언어로 전달할지라도 그 부정적 에너지가 그대로 교인들 가슴에 나비효과가 돼 울려 퍼진다. 그 효과는 내게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커크가 그 희생자요, 안타깝게도 지금 미국 사회의 많은 사람이 그 희생자가 되고 있다. 지금 가해자와 희생자가 한 사람 안에서 뒤범벅되고 있다. 범죄자를 두둔할 마음은 절대로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사회 현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냉철해야 할 것이다.
이런 미국을 반면교사로 보면서 요즘 한국 정치인들 쓰는 말을 보면 여야 할 것 없이 섬찟할 정도이다. 진영 속에 함몰되어 상대를 적으로 보고 지워버리려는 독기가 그대로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죄다. 그 말은 듣는 같은 진영의 사람은 시원하다 하겠지만 이미 같은 부정적 감정의 전염병에 걸려 있기에 그렇다. 다른 진영의 상대는 증오를 느끼게 만들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 언어와 감정의 나비효과를 예수님은 정확히 꿰뚫어 알고 계셨다. 제자 중 하나가 당신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 종의 귀를 칼로 치자 꾸짖으며 말씀하셨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증오를 사랑으로 받아내셔서 온 세상에 ‘사랑의 나비효과’를 확신시키셨다. 칼과 증오와 혐오를 십자가 사랑과 관용으로 받아내신 것이다. 목사인 나부터, 성도부터, 교회부터, 우리 한 사람부터 사랑의 나비효과를 퍼뜨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새문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