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열풍… 불만은 폭주

입력 2025-10-11 00:02
게티이미지뱅크

달리기(러닝) 열풍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러닝 의류나 용품을 파는 업체들은 저마다 호황을 누리고 있으며 러닝 동호회도 늘어나는 추세다. 마라톤 대회도 급증했다. 달리기만 해도 닭강정과 맥주를 주는 ‘닭강정런’, 완주 후 수육과 막걸리를 주는 ‘수육런’ 같은 이색 이벤트도 이어지고 있다. 스포츠계 일각에서는 국내 러닝 인구가 1000만명을 웃돌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러닝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도 뚜렷하다. 무엇보다 ‘민폐 러너’ 때문에 불편을 호소하는 시민이 많다. 상의를 탈의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달리거나, 무리를 지어 달리다가 좁은 도로를 점령하는 경우도 있다. 전문가들은 러닝 인기에 걸맞은 성숙한 러닝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런라니’를 아시나요?

최근 몇 년간 국내에 불고 있는 러닝 열풍의 수준을 드러낸 조사 결과는 한두 개가 아니다. 가령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1월 발표한 ‘2024 국민생활체육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참여한 체육 활동을 묻는 항목에서 가장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 게 러닝이었다.


러닝을 한 적 있다는 응답은 전년도 0.5%에서 지난해엔 6.8%로 급증했다. 반면 ‘걷기’ ‘등산’ ‘수영’ 등의 참여율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스마트 기기 업체인 가민이 지난 6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가민의 자체 운동 분석 앱을 통해 조사한 한국 사용자의 주간 평균 러닝 거리는 9.17㎞로 일본(12.39㎞)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특임이사는 10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과거에는 환자에게 운동을 권해도 잘 따르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스스로 ‘러닝을 시작해 보겠다’고 말하는 환자가 늘었다”고 전했다. 이어 “주변 사람들이 달리기로 활력을 얻는 모습을 보며 자극을 받는 것 같다”며 “스트레스 수준이 높은 한국 사회에서 달리기는 이를 해소하는 효과적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러닝 문화를 대표하는 키워드 중 하나로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여 함께 달리는 ‘러닝 크루’를 꼽을 수 있다. 문제는 최근 들어 러닝 크루 탓에 불편을 호소하는 시민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자전거도로 등을 함부로 넘나드는 일부 러너들을 고라니에 빗대 ‘런라니’(러너+고라니)라고 부르는 신조어도 생겼다. 웃통을 벗고 달리는 ‘상탈족’ 때문에 불편하다는 목소리도 많다.

2년 가까이 서울 불광천 일대에서 러닝을 하고 있다는 정유진(27)씨는 활동하던 러닝 크루에서 최근 탈퇴했다고 한다. 그는 “혼자 뛰는 것이 힘들어 러닝 크루에 들어갔지만 일부 크루원들이 보행자에게 ‘비키세요’라고 소리치는 모습이 불편하게 느껴져 다시 혼자 뛰기로 했다”고 전했다. 서울 성동구 옥수나들목에서 만난 김희영(41)씨는 “아이가 보행로에서 놀고 있는데 20명 정도 되는 러닝 크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면서 아이를 덮칠 뻔했다. 놀라서 소리를 질렀지만 아랑곳하지 않더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러너와 보행자 간 갈등이 깊어지자 서울의 자치구들은 저마다 각종 대책을 내놓고 있다. 서초구는 지난해 10월부터 반포종합운동장 러닝 트랙에서 5인 이상 단체 달리기를 제한하고 인원 간 2m 간격을 유지하도록 했다. 송파구는 석촌호수 산책로에 ‘3인 이상 러닝 자제’를 요청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성북구도 ‘우측 보행·한 줄 달리기’ 캠페인을 벌였다. 여의도공원에는 최근 관련 안내판이 등장했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웃옷 벗기 NO’ ‘박수·함성 NO’ ‘무리 지어 달리기 NO’ ‘비켜요, 비켜 NO’.

“달리기 에티켓 공유돼야”
시민들이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지난달 22일 저녁 서울 잠수교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다.

나름의 규칙을 정해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러닝 크루 구성원들은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러닝 크루에 ‘런라니’ 같은 낙인이 찍히는 상황을 수긍하기 힘들다는 이도 적지 않다.

서울 용산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 러닝 크루에서 이른바 ‘크루장’을 맡고 있는 A씨는 “1~2년 전만 해도 한강에서 뛰면 응원해주는 시민도 있고, 현장에서 크루 가입 방법을 묻는 경우도 많았다”며 “하지만 요즘은 러닝 크루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게 확실하게 느껴진다”고 전했다.

A씨는 그러면서 자신이 속한 러닝 크루가 지키는 규칙들을 소개했다. 이 크루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크루 멤버를 5~6명씩 나눠 1열이나 2열 대오로 뛰게끔 하고 있다. 구성원들을 상대로 시민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 있는 행동은 조심하자는 식의 공지를 할 때도 있고, 일부러 사람이 없는 밤 8시30분 이후에 뛸 때도 많다. A씨는 “달리기를 할 때 시민들이 오히려 길을 막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지나가겠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하는데 러닝 크루에게 일부러 길을 안 비켜주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성숙한 달리기 문화의 필요성을 주문하고 있다. 김대희 부경대 스마트헬스케어학부 교수는 “국내에서는 아직 러너들이 지켜야 할 에티켓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공원 인도 골목길 등에서는 보행자의 안전이 최우선으로 보장돼야 한다”며 “러너들은 무리 지어 뛰면서 구호를 외치는 식의 행위는 지양하고 정부나 자치구 등이 제시한 러닝 규칙을 준수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한명오 기자 myung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