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한마디에 출렁인 한국
IMF 트라우마 다시 떠올라
‘선불’ 투자 사실상 불가능
관세협상은 안보와도 직결
통화스와프·합리적 수익 필요
양국 신뢰가 동맹을 지탱한다
IMF 트라우마 다시 떠올라
‘선불’ 투자 사실상 불가능
관세협상은 안보와도 직결
통화스와프·합리적 수익 필요
양국 신뢰가 동맹을 지탱한다
“3500억 달러(약 490조원)는 선불(up front)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 한마디에 한국 사회가 출렁였다.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아픈 기억인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무너진 기업들, 직장을 잃은 사람들, 금 모으기에 끝도 없이 늘어선 줄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한국 외환보유액의 84%에 해당하는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내놓으라는 요구는 그 트라우마를 다시 불러냈다.
한·미 관세협상의 구조는 단순하다. 미국은 한국산 자동차와 부품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춰주고, 한국은 미국에 3500억 달러를 투자한다. 문제는 해석이다. 한국은 대출·보증을 전제로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전액 현금 투자라고 못 박았다. 게다가 투자 시기와 용도를 미국이 정하고, 수익금의 90%를 가져가겠다는 식이다. 우리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다.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외환보유비율은 IMF 위기 때 수준으로 쪼그라든다. 이재명 대통령이 “탄핵 사유가 될 수 있고, 외환위기를 불러올 일”이라고 경고한 게 과장이 아니다.
그렇다고 투자 약속을 깨면 관세 25%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차라리 관세를 감수하고 기업을 직접 지원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도 있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관세협상은 경제를 넘어 안보와 직결된다. 주한미군 감축 또는 철수 같은 정치적 후폭풍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다. 협상이 결렬되면 세계는 한국이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할 것이다. 금융시장은 즉각 반응한다. 외국인은 한국 주식시장에서 돈을 빼내 주가는 폭락하고, 환율은 급등할 수 있다.
미국이 한국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해 마이너스통장을 쓰듯 원화를 담보로 달러를 확보할 수 있다면 또 모를 일이다. 그러나 미국이 우리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통화스와프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그의 지적대로 통화스와프 하나로 모든 문제가 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의 안전판조차 없다면 IMF 외환위기의 그림자는 짙어진다. 결국 중요한 건 ‘통화스와프+보완 대책’이라는 패키지 접근이다. 미국이 선불만 고집한다면 협상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세계적 석학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세계화는 피할 수 없지만, 그 형태는 우리가 어떻게 제도와 규칙을 세우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저서 The Ages of Globalization). 지금 한·미 협상도 마찬가지다. 투자와 관세를 둘러싼 갈등은 피할 수 없더라도 제도적 안전판을 마련해야 한다. 통화스와프와 합리적 수익 배분은 단순한 협상 카드가 아니라 불균형한 세계화가 국민에게 손해로 돌아오지 않게 만드는 최소한의 장치다. 미국의 관세로 대미 수출이 줄었어도 글로벌 수출은 증가했다. 한국도 미국만 바라보는 ‘단일 해법’이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다가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협상의 분수령이 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동시에 참석하는 국제무대에서 한국은 고립을 피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미국 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국과의 전략적 대화를 통해 간접적 지렛대를 마련할 수도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상상력을 발휘한 외교적 해법이다.
정치권의 단합도 절실하다. 대미 투자는 정쟁의 소재가 아니라 국가 생존의 문제다. 여당은 야당과 손잡아야 하고, 대통령은 여야 대표를 불러 협력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유엔총회 참석 결과 설명을 계기로 자리를 만들 수도 있다. 보수는 한·미 네트워크에 강점이 있고, 진보는 다자 협상 경험이 풍부하다. 서로의 장점을 살릴 필요가 있다. 시민사회와 교계, 기업까지 가용한 모든 채널을 열어야 한다. 중요한 건 이 협상을 단순한 ‘돈거래’로 내맡기지 않고 외교적 자산을 총동원하는 일이다. 다만 서두르지 말고, 국면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무르익도록 기다리는 여유도 필요하다.
3500억 달러와 동맹의 가격. 그것이 돈으로만 환산된다면 동맹은 거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가격이 신뢰로 채워질 때, 동맹은 힘을 가진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