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 당신을 기억합니다

입력 2025-10-01 00:35

필자의 조부모는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 기억을 잃었다. 알츠하이머 치매는 익숙한 얼굴을 처음 보는 얼굴로 바꿨고 할아버지는 필자를 알아보지 못해 존댓말을 썼다. 몇 년 후 할머니에게도 치매가 왔는데, 그로 인해 두 분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잃어갔고 서로의 존재에 대한 감각도 조금씩 사라졌다.

할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할머니에게 알렸다. 그 소식이 할머니에게 어떤 기억을 갑자기 살려냈다.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너희 아버지가 잘 있다고 하지 않았냐며 원망 어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잠시 뒤 그 상황은 할머니의 기억에서 사라졌고 슬픔도 따라 사라졌다. 이내 할머니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주위를 쳐다봤다. 할머니의 의식 위로 한 사람의 모습과 그 사람이 이제 세상에 없다는 인식이 같이 떠올라 슬픔을 불러냈지만 모든 것이 다시 의식 아래로 가라앉은 것 같았다. 점멸하는 불빛처럼 기억은 잠시 내비쳤다가 꺼져 버렸다. 불빛 속에서 언뜻 남편을 본 것이다. 깜빡깜빡 돌아왔다 사라지는 기억이 지켜보는 가족들을 더 슬프게 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달 전 할아버지 사진을 가져오라고 했다. 인생이 망각 속으로 떠내려갈 때 어떤 기억 하나는 꼭 건져내려는 사람처럼. 할머니에게 사진은 일종의 지푸라기였고,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던 대상은 할아버지였다.

질병으로 인해 소중한 이를 잃는다. 상실은 아픈 흔적이다. 그런데 기억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다.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상실의 고통조차 잃는다. 치매는 삶과 이별하는 방식치고는 가혹하다. 인생이 기억을 담은 그릇이라면, 노화는 기억을 조금씩 덜어 내지만 치매는 그릇을 깨뜨린다. 쏟아진 기억은 주워 담을 수 없고 단지 깨진 인생의 조각들을 억지로 끼워 맞춰 보는데, 그게 인생도 아니고 기억도 아니다. 사람은 과거의 나와 과거를 회상하는 현재의 나, 즉 기억되는 사람과 기억하는 사람으로 두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기억되는 사람이 먼저 사라지고 이제 기억하는 사람조차 사라진다. 결국 ‘그 사람’이 사라진다. 두 사람이었던 인생이 아무도 없는 인생이 된다.

하지만 남아 있는 우리는 ‘그 사람’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잃어버린 기억도 기억한다. 정작 조부모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필자는 조부모의 삶을 기억한다. 할머니가 애써 기억하려 했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렇게 기억을 붙잡으려 했던 할머니도 기억한다.

기억의 수명이 유한하기에, 우리는 기억을 잃어 슬퍼하고 기억을 붙잡으려 노력하고 기억하지 못한 것을 미안해한다. 그래서 기억해 주길 바라고(“날 잊지마”), 기억을 약속하고(“기억할게”), 기억으로 위로한다(“영원히 잊지 않을게”). 결핍이 가치를 일깨우는지, 기억이 소멸하기 때문에 기억이 중요하다. 그런데 기억의 가치는 기억 자체의 가치만이 아니다. 기억하는 행위의 가치이기도 하다. 우리가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을 기억한다는 행위의 가치다. 이런 기억 행위는 일종의 연민이다.

인공지능(AI) 이전에도 컴퓨터의 기억은 이미 인간을 능가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AI, 반면에 기억했던 모든 것을 조금씩 잃어가는 인간. 하지만 “당신을 기억할게요”라는 말로 위로하고 위로받는 것은 AI가 아닌 인간이다.

잊지 못하는 존재 AI는 기억의 의미든, 기억을 잃는 의미든, 기억을 잃어가는 존재에 대한 연민이든 이해할 수 있을까. 때론 죽음보다 잊혀짐을 더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이다. 타인에 의해 기억되는 것은 기억이 죽어가면서도 또 기억이 살아 있는 방법이다. 한 사람의 기억이 죽어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그 사람을 잊지 않을 수는 있다.

김대현 창원파티마병원 흉부외과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