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초대교회를 떡을 떼는 공동체로 소개합니다. 여기서 ‘떡을 떼며’라는 표현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식사가 아닙니다. 이 말은 성찬과 일상의 식사를 함께 아우르는 표현으로,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삶을 지탱하는 핵심이었습니다. 말씀 기도 교제 식사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식사는 환대를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자청하여 나그네에게 식사를 대접합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단순한 환대를 넘어 예수님을 대접한 것이라 칭찬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마 25:35)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식사를 통한 환대가 베풀어지는 자리에서 계급 신분 성별 나이 인종을 떠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식탁은 예배의 자리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올렸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식탁에서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예배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식탁은 곧 신앙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더 나아가 식탁은 전도와 선교의 자리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고 기록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식사 교제를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함께 나누는 식사는 복음의 증언이었고 공동체적 삶 자체가 전도의 통로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도 식사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제자들은 교실에서 정해진 교과목을 통해 훈련받은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늘 주님과 함께했고 식사 자리는 중요한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제자들과의 유월절 마지막 식사는 자신을 내어주심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부활 후에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식탁을 베푸시며 베드로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산업화와 개인주의, 코로나19 팬데믹은 교회의 공동 식사 전통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공동체의 식사는 귀찮고 부담스러운 일이 됐습니다. 집을 개방하고 식사를 함께하는 일이 희귀한 시대가 됐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보여준 식사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공동체 식사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거창한 구호를 외칠 필요 없이 주변의 가까운 지체를 초대해 식사를 나눠 봅시다. 굳이 힘들고 외로운 지체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이기에 힘쓰고 함께 식사 교제를 나누었던 것처럼 나부터 먼저 가정을 개방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소그룹 모임을 교회에서 하던 분들은 소그룹 모임을 집으로 옮겨 식사를 함께하며 모임을 가져 봅시다. 소그룹 식사와 함께 주변 이웃이나 그동안 뜸했던 지체들, 전도하고 싶었던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하면 바로 그곳에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식탁은 단순히 끼니를 해결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공동체를 세우는 신학적 자리입니다. 초대교회는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미했고 그 결과는 부흥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식사의 의미를 회복합시다. 공동체 식사가 다시금 예배의 자리, 교제의 자리, 선교의 자리가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에 초대교회와 같은 은혜와 부흥을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구병옥 교수 (개신대학원대)
◇개신대학원대는 칼뱅주의 개혁신학의 토대 위에 역량 있는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 배출에 힘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