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의 ‘미스터 탬버린맨’이 아날로그 감성처럼 흘러나오는 작업실은 규모가 좀 작았다. 실제 크기의 5분의 1로 줄였다지만, 실제라도 그리 크지는 않을 거로 가늠 됐다. 그런 작업실에서 작가 김을(71)은 수험생 책상처럼 작은 작업대 앞 의자에 앉아 손안에 들어가는 크기의 입체 작업을 만지는 포즈를 카메라 앞에서 해줬다. 작업하기 전 예열하듯 꼭 듣는다는 그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모습이 큐브를 만지작거리는 소년처럼 즐거워 보였다.
지난 25일 서울 은평구 진관1로 사비나미술관에서 하는 김을 개인전 ‘트와일라잇 존 스튜디오’를 찾았다. 메인 전시장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세 채의 작은 집이다. 작가의 스튜디오(작업실)를 재현한 목조 설치 작품이다. 작가는 경기도 용인의 45평짜리 작업실을 드로잉 공간, 오브제 입체 공간, 회화 공간, 대형 작품 공간, 생각의 공간 등 용도별로 구획해 쓴다. 그 가운데 드로잉, 오브제 입체, 생각의 공간을 전시장에 구현했다.
집 짓는 일은 그가 대목장 출신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는 원광대에서 금속공예, 홍익대 대학원에서 귀금속 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후 생계유지 차원에서 집 짓는 대목장 일을 병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전시장에 구현한 작업실 벽면에 생뚱맞게 걸려 있는 망치는 그 시절을 상기시키는 단서다. 망치 수집가이기도 해 250점 이상을 모았다. 느슨해지는 자신의 뒤통수를 때리는 상징 같은 물건이라고 했다.
대목장일이 작업에 끼친 영향을 물었다.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고단한 목수 일을 마치고 귀가하면 오히려 회화를 하고 싶은 욕망이 더 끓어올랐습니다.” 미대를 갈 때 회화과를 원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오히려 1989년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야 주경야독하듯 회화를 할 수 있었다.
전시장에서 회화보다 먼저 내 눈을 끈 것은 90년대 말부터 했다는 ‘오브제 입체 조각’이다. 한쪽 벽에 매단 선반에 손바닥 크기 앙증맞은 조각들이 줄지어 있다. 기성품 오브제(물건)에 자신의 창작물을 더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국내에는 “맛있는” 중고가 없다며 일부러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벼룩시장을 뒤지기도 한다. 그렇게 찾아낸 미제 중고 장난감 군용 트럭 위에 그가 만든 ‘눈물방울’ 조각이 잔뜩 실려 있다. 또 다른 미제 장난감 트럭 위에는 자소상이 얹혀 있다.
눈물방울은 김을의 작품세계에서 조각과 회화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는 작가의 페르소나이다. “슬픔을 의미하는 게 아니에요. 눈물은 사람의 몸에서 배출되는 모호한 액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의 결정체, 희로애락을 관장하는 무엇입니다.”
트럭에 실린 눈물방울은 이렇듯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은 인생을 은유하는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멋있다”가 아니라 “맛있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작업실 규모가 작품의 스케일이자 작가적 성공까지 결정한다며 모두가 큰 작업실을 찾는 시대 아닌가. 하지만 그는 남들처럼 ‘멋진’ 크기의 작업실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내놓은 결과물마저 작다. 그런데 너무 작아서 오히려 눈에 띈다. 손맛이 느껴지는 작업이다.
회화는 어떤가. 전시장에 나온 작업은 회화의 전범 같은 유화가 아니라 드로잉이다. 그 역시 처음 작업을 하던 때는 유화를 했다. 그런데 1997년 작업실에 불이 나 작품이 전소된 시련을 겪었다. 이참에 드로잉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면서 2000년부터 드로잉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밤마다 드로잉 북에 그림을 그렸다. 음악을 듣는 자신을 그리거나, 죽음을 생각한 듯 흙을 파낸 빈 무덤 자리를 그리기도 했다. 미대 강사 시절, 한 학기 종강이면 학생들이 버리고 간 드로잉을 주워서 덧입힌 그림도 있다. 드로잉은 유화의 밑그림으로 인식되며 이류 그림으로 치부됐지만 오히려 그는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김을은 조각도, 회화도 멋진 걸 추구하지 않는다. 모두 작은 사이즈다. 그럼에도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남과 다른 걸 갈구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걸 “무법의 세계”라고 표현했다. 기성의 전통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으로 결기보다는 여유가 느껴졌다. ‘말썽 많은 회화’ 연작은 주류에 조용히 저항해온 방식을 드러낸다. 과거 단체전에 회화도 입체도 아닌, 마치 수납장 같은 이 연작을 내놨을 때 주변 동료들은 “너무 나간 것 아니냐”며 비판적 반응을 보였다. 논란 자체가 실험 정신을 드러내기에 이번에 아예 제목까지 붙여 대거 들고 나왔다.
전시장을 둘러보면 느끼겠지만 김을의 작업 세계는 거창하지도, 정교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게 맛이다. 작업실 문짝에 붙인 글귀는 그 맛이 어디서 연유하는지 알려준다. “생각은 깊게, 그림은 대충.” 10월 26일까지.
글·사진=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