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큰형이 농사로 어머니를 도왔지만 자녀들 뒷바라지는 온전히 어머니 몫이었다. 대학은 언감생심이었고 동생들도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준비해야 했다. 증평공고 3학년 2학기,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거제도 대우조선에서 사람을 뽑는다. 면접 보러 갈 학생 있니.” 교실은 조용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월급이 많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결국 다음 날 면접을 보러 갔다.
인사부장은 질문을 던졌다. “자네 종교는 뭔가.” 교회에 나간 적은 거의 없었지만 얼떨결에 “기독교입니다”라고 했다. “교회는 몇 년 다녔나.”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합쳐서 6년입니다.” 열 명이 지원해 일곱 명이 붙었고 그 안에 내가 있었다. 부모님의 신앙을 내 것처럼 속여 합격을 얻어낸 셈이었다. 합격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교회 종소리만 들리면 가슴이 철렁했다. 거짓으로 얻은 기회라는 죄책감이 따라다녔다.
옷가지와 편지지를 넣은 종이 가방을 들고 고향을 떠났다. 버스는 대구 마산 통영을 거쳐 남쪽 끝을 향해 달렸다. 산이 바다로 꺼져 내리고 짠내가 바람을 타고 스며들었다. 거제 고현에 닿아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아주동 남문 앞에 섰을 때 바다 위로 거대한 골리앗 같은 크레인이 솟아 있었다. 1986년 10월 31일,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마침 라디오에서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흘러나왔다. 열여덟의 나는 그렇게 거제도에서의 청춘을 시작했다.
조선소는 거칠었다. 용접 불꽃이 사방에서 튀었고 쇳내와 먼지가 코를 찔렀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음에 질려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불황이 닥치자 함께 내려온 친구 다섯은 차례로 거제를 떠났다. 곁에 남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공장 기숙사 방은 점점 비어 갔고 작업장에서도 익숙한 얼굴이 사라졌다. 나도 갈등했지만, 조선소에서 버티지 못한다면 세상의 어떤 일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여겼다.
한겨울 옥포만의 바람은 거칠었지만 분지골에서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면 견딜 만했다. 월급을 받으면 내가 쓸 것만 빼고 10만원씩 고향으로 보냈다. 집안 형편에 보탬이 된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2년 반 뒤 군대에 다녀와 다시 현장에 복귀했다. 선원들이 생활하는 거주구를 만드는 목의과로 발령받아 칸막이와 가구를 설치하는 일을 맡았다. 무거운 자재를 옮기고 유리 섬유 패널을 자르면 사방으로 가루가 날렸다.
하루 열 시간 가까이 마스크를 쓴 채 중노동을 버텼다. 폐는 점점 약해지고 호흡은 힘들어졌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을 때마다 간신히 숨을 들이켜며 하루하루를 넘겼다. 몸은 지쳐 갔지만 꾀부리지 않았다. 군함과 잠수함 건조를 시작하며 보온 작업을 맡았다.
나는 조선소에서 숙련된 일꾼으로 자라갔다. 매년 시월의 마지막 날이면 처음 거제도에 발을 디딘 순간을 떠올리며 ‘잊혀진 계절’을 불렀다. 하지만 흥얼거림이 더해질수록 내 몸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잔해가 내 달리기의 요람이 될 줄은.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