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안 교수의 질문하는 삶]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이까

입력 2025-09-30 00:30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이 그를 찾아와 묻습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가인은 냉담하게 답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이까.”

이 한마디는 단순한 부정이 아닙니다. 가인은 자기 책임을 부인하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대답 속에는 인간 존재 전체가 직면하는 근본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나는 타인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내가 외면한 타인의 고통은 과연 나와 무관한가.’

하나님의 질문에 가인은 자신이 아벨을 돌볼 이유가 없다는 듯 되묻습니다. 그 순간 가인은 인간됨을 부정합니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데, 이 관계는 필연적으로 책임을 전제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가 지적하듯 가인과 아벨의 사건은 인간 사회의 근원적 구조를 드러냅니다. 인간은 타인을 비교 대상으로 여길 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힙니다. 가인의 불편한 마음은 동생의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사실보다 자기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됐습니다. 자기 존재를 부인당하는 경험은 인간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가인의 상처는 칼날이 돼 자신의 경쟁자인 아벨에게 향했습니다.

가인의 마음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합니다. 타인이 받는 인정과 성공, 행복은 때때로 우리 존재를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비교는 인간관계를 순식간에 경쟁과 위계의 구조로 바꿉니다.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은 지켜야 할 존재가 아닌 밀어내고 배제해야 할 대상으로 변합니다. 교회에서조차 공동체가 무너지고 서로를 비난하는 이유는 비교와 경쟁 속에서 서로를 ‘지킬 수 없는 존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의 응답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변명을 묵인하지 않습니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부터 내게 부르짖느니라.”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는 자, 목숨을 잃어 말할 수 없는 자의 침묵 속 외침을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선언입니다.

말할 수 없는 자의 고통, 이름 없이 사라지는 자의 외침, 사회적 약자와 희생자의 침묵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들의 피맺힌 부르짖음은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하나님은 반드시 이를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폭력과 희생을 감추고 정당화하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에 대한 결정적 반박입니다.

가인의 질문은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나는 내 이웃과 동료, 가족을 지키는 자인가. 아니면 그들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외면하는 자는 아닌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얼굴에 다시 주목하게 됩니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인간의 얼굴은 외형을 갖춘 단순한 사물이 아닌 “죽이지 말라”는 윤리적 부름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름에 응답하고 반응을 보이는 순간 책임이 시작됩니다. 책임은 법적 의무 이전에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내가 먼저” 반응해야 한다는 존재론적 자각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얼굴을 만납니다. 어떤 얼굴은 환영을 받지만, 어떤 얼굴은 무시당합니다. 또 다른 얼굴은 지워진 채 침묵 속에 방치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얼굴도 잊히지 않습니다. 눈물 흘리는 얼굴, 외로이 죽어간 얼굴, 말할 수 없는 얼굴은 모두 하나님께 기억되는 존재입니다.

신앙은 단지 예배하고 기도하는 행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타인을 지키는 삶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내 아우를 지킨다는 건 혈연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를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고 이들의 고통에 응답하며 생명을 지켜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묻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이까.”

믿는 자들은 이 질문에 분명히 대답해야 합니다. “예, 저는 제 형제자매와 이웃을 지키고 보살펴야 할 사람입니다.” 이 대답은 말로 그칠 수 없습니다. 삶의 태도와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누군가를 끝까지 지켜주는 사람, 외면당한 자 곁에 있어 주는 사람, 고통받는 이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강영안 한동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