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듯한 살림살이에 한창 먹성 좋은 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시장으로 가는 어머니 발걸음은 늘 무거웠다. 그래도 ‘남의 살’이라도 산 날에는 골목 입구에서부터 잰 발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몇 안 되는 그런 날 가운데 오징어뭇국 올라오는 날이 유난히 좋았다. 불그스름한 국물에 밥을 말아 쫄깃한 오징어 살과 함께 먹으면, 마파람에 게 눈 감춘다는 말이 밥상에 펼쳐졌다. 지금도 대형마트나 전통시장에서 생물 오징어만 보면, 오징어뭇국이 떠오르고 침이 꼴깍 넘어간다.
하지만 막상 오징어뭇국을 먹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다. 가격표를 보면서 들었다 놨다 하는 아내를 볼 때마다 애써 담담한 척, 그냥 가자고 한다.
살벌한 가격표는 한두 해 일이 아니다. 지난 30년간 오징어 가격은 무섭게 올랐다. 통계청의 소비자물가지수가 1995년 대비 올해까지 2.2배 오르는 사이에 오징어 물가는 5.6배나 치솟았다. 지난해 연근해에서 잡힌 물오징어 1㎏ 가격은 1만4455원으로 2023년보다 29.2% 상승했다. 올해는 또 올랐다. 지난달에 오징어값은 전년 대비 30%가량 비쌌다.
유난스러운 뜀박질의 배경에는 어획량 내리막길이 자리하고 있다. 공급이 달리니 값이 오를 수밖에. 1990년대까지만 해도 20만t을 넘나들던 연근해 살오징어 생산량은 지난해 1만3546t에 그쳤다. 역대 최저치로 직전의 2023년과 비교해도 42%나 줄었다. 30년가량 세월 동안 어획량이 20분의 1로 쪼그라들었으니, 오징어 실종 사건이라고 부를 만하다.
실종 상태인 오징어를 다시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올해 여름 날씨를 생각하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듯하다. 우리 바다는 너무 더워졌다. 이런 현상이 오징어만의, 바다만의 얘기도 아니다. 육지도 ‘기후 몸살’을 세게 앓고 있다. 기후위기의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 1.5도를 넘나드는 중이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1850~1900년) 대비 1.5도 이상 상승하면, 극한 기후와 해수면 상승, 생태계 붕괴 같은 심각한 기후재난이 본격화한다. 파리기후협정(2015년)에서 상승 폭을 1.5도 이하로 제한하자고 합의했지만, 2023년에 1.55도까지 상승해버렸다. 지난해는 1.6도를 찍었다.
밥상에 오르는 식재료가 달라지는 변화는 뉴스로 보는 물가 상승, 기후재난보다 더 뼈저리게 와닿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아직 시간이 남았고, 인류가 적응하면서 조금씩 고쳐나가면 된다고 여기는 목소리들도 있다. 그러나 기후위기가 실물경제에 미치는 파장은 광범위하고 처절하며 이미 진행형이다. 세계 곳곳에서 식량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 기근, 난민을 유발하는 중이다. 홍수, 태풍, 폭염, 산불 등으로 도로, 공항, 항만, 공장 같은 핵심 시설에 손상을 입어 공급망 붕괴도 빚어지고 있다. 몸서리쳐지는 건 이 빈도가 점점 잦아지고 있어서다.
노동생산성도 떨어진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30년까지 전 세계 노동시간의 2%가 손실된다고 전망한다. 여기에 금융 불안까지 얹으면 위기의 강도나 크기는 가늠키 어렵다. 기업과 가계의 부도, 자산가치 추락은 불 보듯 뻔하다. 기후위기는 기아, 난민, 이념 갈등, 폭력적 충돌을 빚어내고 급기야 부족해진 식량과 에너지를 놓고 벌어지는 전쟁이라는 잔혹한 얼굴로 돌변할 것이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그런데도 기후위기에 자꾸 정치와 이념의 옷을 입히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기후변화를 경고하는 이들을 겨냥해 “녹색 사기”라고 비아냥댄다. 우리 사회는 ‘재생에너지=좌파’ ‘원자력발전=우파’라는 말도 안 되는 등식을 만들어버렸다. 이대로라면, 다음 실종자는 누구일까.
김찬희 편집국 부국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