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3500억 달러 현금 지급은 불가”… 한·미 치킨게임 양상

입력 2025-09-29 00:03 수정 2025-09-29 00:08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음 달부터 의약품과 대형 트럭, 주방 캐비닛, 가구 등에 25~100% 수준의 관세를 추가한다고 25일(현지시간) 예고했다. 사진은 26일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항구에 정박한 대만 해운사 에버그린 컨테이너선 앞에 성조기가 휘날리는 모습. AFP연합뉴스

한·미 관세협상 후속 조치를 둘러싼 양국 간 대립 국면이 ‘치킨게임’으로 흐르고 있다. 미국 측의 ‘3500억 달러 투자금’ 현금 지급 요구에 우리 정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반박하며 물러서지 않는 팽팽한 대치 양상이 길어지고 있다. 정부는 다음 달 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까지 대안을 모색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천문학적 대미 투자금에 대한 강대강 구도가 해소되지 않는 이상 최종 합의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정부는 3500억 달러 대미 투자를 위해선 ‘무제한 통화스와프’가 전제돼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한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의 일정을 함께 수행한 뒤 지난 27일 밤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하며 “일시에 3500억 달러를 일본처럼 (지급)해야 한다면 통화스와프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에게 자세히 얘기했다”며 “(베선트 장관이) 워싱턴에 돌아가서 내부적으로 협의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다만 미국 측의 투자금 증액 요구에 대해선 “들은 바 없다”고 일축했다.

통화스와프 체결과 별개로 한·미 간 환율 협상은 합의점에 도달했다. 구 부총리는 “미국과의 협의가 이번에 완료됐고 조만간 발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한·미 2+2 통상협의’부터 이어졌던 환율 협상은 미국 측이 제기해 온 환율조작국 문제와 관련해 ‘환율은 시장에서 결정돼야 한다’는 큰 틀에 대해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미국 측이 통화스와프 체결에 대해선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아 관세 불확실성은 계속될 전망이다. 앞서 우리 정부는 미국과의 무역합의에서 반도체·의약품 등 관세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약속받았다고 했지만 후속 협의가 미뤄지며 최혜국 대우 적용도 지연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최종 협정을 맺은 유럽연합(EU)과 일본 등에만 의약품 관세 15%가 적용될 경우 약 5조원 규모의 국내 의약품 대미 수출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수출 피해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3500억 달러 투자 요구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송영관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는 상황에서 3500억 달러 투자는 외환위기로 이어진다”며 “대미 투자금 변화가 없다면 APEC 정상회의에서도 후속 합의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미국 측과 대안 마련을 위한 협의를 계속한다는 입장이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아세안(ASEAN) 경제장관회의 참석 후 지난 27일 귀국하며 취재진과 만나 “(미측에) 상업적 합리성을 보장하고, 특히 실현 가능한 방식으로 (대미 투자 패키지가) 운영되도록 하는 게 결국 양국 국익에도 부합한다는 부분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세종=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