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어이없는 화재로 체면 구긴 디지털 정부

입력 2025-09-29 01:20
28일 대전 유성구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인해 불에 탄 리튬이온 배터리가 소화수조에 담겨 있다. 연합뉴스

세계 최고 수준이라 자랑하던 디지털 정부 위상이 어이없는 화재로 흔들리고 있다. 지난 26일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 본원 전산실 배터리에서 난 불로 주말 동안 정부24, 모바일 주민등록증, 무인민원발급기, 온나라시스템 등 647개 행정서비스가 멈췄다. 주민등록등본이나 세금 관련 서류를 발급받으려던 시민들은 무인발급기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금융권에서는 모바일 신분증을 활용한 계좌 개설이나 인증서 발급이 막혔으며, 토지대장 발급, 병적증명서 발급, 국고금 수납과 보조금 관리시스템까지 일상적 행정 서비스가 줄줄이 먹통이 됐다.

올해 3대 핵심 과제 중 하나로 ‘디지털 정부’를 내세우며 서비스 장애 예방과 안정성 확보를 약속했던 행정안전부의 청사진이, 국정자원 화재로 공허한 선언에 그치고 말았다. 사고 원인을 두고 배터리 사용 연한이 지났다는 지적과 전원을 끄지 않고 전선을 분리한 작업 실수라는 주장이 엇갈리지만, 어느 쪽이든 이번에도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 국민들은 기가 막힐 따름이다. 더 납득할 수 없는 건 이 같은 대형 사고 시 백업 시스템, 즉 이중 운영 체계가 전혀 마련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어제 비상대책회의에서 “2023년 발생한 전산망 장애 이후에도 운영체계 이중화 등 신속한 복구 조치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는 세금 납부와 서류 제출 기한을 연장하고 각종 민원 발급을 수기로 대체한다고 했지만, 평일이 시작되는 29일부터 대혼란은 피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나온다. 화재가 주말에 발생해 평일보다 민원 수요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피해 복구가 늦어질 경우 월말 수요에 일주일 이상의 긴 추석 연휴를 앞두고 있어 서비스 불편이 가중될 수 있다. 야당은 행안부 장관 경질과 대통령 사과를 요구하고, 여당은 과거 정권 책임론을 꺼내며 “누워서 침 뱉기”라 맞선다. 이런 인재(人災) 상황에서 정치권이 책임 공방에만 매달리니 정작 시급한 제도적 보완과 안전망 강화 논의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디지털 정부 평가에서 최근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고, 유엔 전자정부 평가에서는 세계 4위에 오르는 등 모범사례로 꼽혀왔다. 개발도상국 공무원들이 한국을 찾아 전자정부를 배우고 있다. 이 같은 디지털 정부의 위상은 기본이 무너지면 순식간에 흔들릴 수 있다. 반복되는 대형 사고와 혼란의 고리를 끊으려면 근본적인 점검과 개선이 먼저다. 사고가 잊혀질 때까지 책임을 떠넘기는 구태를 반복한다면, 디지털 강국에 이어 인공지능(AI) 3대 강국이라는 꿈의 실현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