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가을 구례

입력 2025-09-29 00:33

전남 구례에는 ‘책방 로파이’라는 작은 서점이 있다. 이곳에선 종종 시인과 뮤지션이 함께 마련한 낭독 공연을 한다. 시와 음악이 한자리에서 공명하며 관객을 만나는 시간이다. 초대를 받아 9월 낭독 공연을 뮤지션 이주영님과 하게 되었다. 기차를 타고 구례에 도착하니 날씨가 참 좋았다. 비가 올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리허설을 위해 바로 책방으로 갔다. 마당이 있는 가정집을 책방으로 꾸민 곳이었다. 서점보단 책방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파란색 철제 대문, 담벼락을 타고 마당까지 드리워진 감나무, 나무로 된 마루, 바로 앞 골목길엔 아기 길고양이 여럿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애써 세련되게 꾸미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이 책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점이 좋았다. 큐레이션이 잘돼 있는 책장을 구경할 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저녁 7시. 가을밤에 시와 음악과 관객이 함께했다. 촛불과 작은 조명이 책방의 마당을 은은하게 비춰줬다. 지역 주민뿐 아니라 부산에서, 서울에서 구례에 여행을 왔다가 오신 분들도 있었다. 한 관객은 반려견을 데려오기도 했다. 공연 중 시와 노래를 듣는 개와 종종 눈이 마주쳤다.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내게 무슨 말인가를 해주는 것 같았다. “한 뼘의 사랑과 한 발자국의 위로가 얼마나 커다랗고 깊은지”(썬캐처)라는 시에 썼던 문장이 공연의 제목이었다. 나는 그동안 사랑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던 것들을 이야기했다. ‘사랑’에 대해 갖는 의미가 모두 다를 텐데, 지금의 나에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해보려는 마음이 사랑인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잠시 저마다의 사랑을 떠올려 보기를 바랐다.

공연이 끝나고 한 분이 다가와 말했다. 자신에게도 사랑을 믿지 못한 시간이 있었다고, 그럴 때 시의 구절이 힘이 돼 줬다고. 진솔한 마음의 이야기들. 반짝이는 진심들. 이제 가을이 될 때마다 나는 구례에서 봤던 눈빛들이 떠오를 것 같다.

안미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