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두 개의 이름으로 살아왔고 살고 있다. 본명은 이정민이지만 글을 쓸 때는 이수민이다. 이정민은 현재 1인 출판사인 파초를 운영하고 있다. 남을 위한 삶을 꿈꾸며 국제구호단체에서도 일했다. 이수민은 소설과 희곡을 쓰고 번역을 한다. 실패와 상처를 겪은 현실의 이정민은 이수민을 통해 치유를 받는다. 글을 쓰기 위해 지난해 여름 잠시 머물렀던 서울 서대문구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지난 18일 이정민(42)을 만났다. 길진 않지만 그가 살아온 삶과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의 의미를 들을 수 있었다.
학창 시절, 숨 막혔던 교실과 밤의 자유
“평범한 공립학교에서 마흔다섯 명이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시간표를 따라가는 게 숨 막혔어요.” 어린 시절 이정민은 공부를 좋아했지만 학교는 끔찍이도 싫었다. 매번 지각해서 선착순 달리기를 했고, 하기 싫은 야간 자율학습 대신 몰래 집으로 향하는 때도 있었다. 유일한 해방구는 중학교 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영어 학원이었다. 입시 학원은 아니었다. 신문, 에세이, 영화 대본 등의 텍스트를 영문으로 읽는 곳이었다. 그는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시작해서 자정까지 이어졌던 그 수업을 무척 좋아했다”면서 “학교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졸린 눈을 비비며 원서를 읽었던 그 밤들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는 “칼 세이건의 소설을 영화화한 ‘콘택트’는 지금도 몇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했다.
이뤄진 꿈, 그러나 실패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대학에선 고민 없이 영문학을 전공했다. 어릴 적 막연하게 ‘이타적인 삶’을 살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 꿈은 해외에서 이루고 싶었다. “사람이 태어났으면 넓은 세상에 가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대학 입학 후 첫 여름방학 때 어머니는 오가는 비행기 표만 끊어주고 딸을 유럽으로 한 달 배낭여행을 보내버리기도 했다.
외교관과 국제구호단체를 놓고 진로를 고민하며 외교학을 복수전공을 했다. 공부하면 할수록 외교학은 ‘피도 눈물도 없는’ 학문이었다. 그는 “누군가는 현실적인 국익을 대변해야 하겠지만 국경 안의 공동체만을 보호 대상으로 제한하고 오로지 그들의 권익만을 위해 일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국제 인권을 공부하며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유엔 산하 국제구호기구에 취직했다. “나이 서른에 이만하면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경험하게 될 추락은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지요.”
인생의 전환점, 필리핀의 경험
2013년 그는 필리핀에서 2년 계약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근무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민다나오 무력 분쟁이 격화하고 보홀 지진과 슈퍼 태풍 하이옌 등 재난이 한꺼번에 닥쳤다. 태풍으로만 1만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정작 구호에 나서야 할 단체에서는 대표와 부대표 간의 권력 싸움이 벌어졌다. 중간 간부와 직원들은 눈치를 보면서 자신들의 임무를 망각한 듯했다. 그는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가족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심리적 위로와 경제 지원을 원했지만 직원들은 재난 와중에도 어떻게 승진하고 몇 개월짜리 다음 계약을 이어가기 위해 서로를 경계하고 협력하지 않았다”면서 “약자를 보호해야 할 조직이 어떻게 약자를 대하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필리핀에서 일하기 전후, 제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한동안 인간에 대한 환멸에 시달렸다”고 했다.
문득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는 재계약을 포기하고 2년 만에 귀국해 제주도에서 한 달 살이를 했다. 제주도 집에서 눈 덮인 한라산을 바라보다가 문득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단편을 몇 편 썼는데 하나같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 일 없이 쏘다니다 들른 동물원에서 만난 것이 ‘산미치광이’로 불리는 동물 호저였다. 그는 “철창에 갇혀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산미치광이를 보니 문득 그 녀석을 가둬서 돌보는 사육사가 궁금해졌다”면서 “대뜸 사육사를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산미치광이와 사육사’라는 단편을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산미치광이와 사육사’는 2017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단편 소설 부문에 당선됐다.
글을 쓰면서 얻은 치유의 경험
등단 후 필리핀의 경험을 장편으로 써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소설 쓰기가 힘겨워 몇 년 동안 글쓰기를 멈췄다. 그러다 2021년 지방의 작은 신문에서 칼럼을 연재할 때였다. 평소 존경하던 이란 인권 변호사 나스린 소투데에 대한 글을 쓰려고 준비하던 그는 다큐멘터리 ‘나스린’을 보다 한 인물에 깊이 빠졌다. 녹색혁명 당시 나스린과 함께 투옥됐다가 일찍 세상을 등진 극작가 나자닌 데이히미였다. 나자닌이 감옥에서도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죽음과 소녀’를 무대에 올렸다는 사실은 깊은 영감을 줬다. 그때부터 나자닌에 대해 자료를 뒤져가며 완성한 것이 희곡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였다. 민주화와 여성 인권을 위해 싸워 온 이란 여성들의 삶을 ‘극중극’ 형식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2023년 벽산희곡상을 받으며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그는 “희곡을 쓰면서 인간에 대한 환멸이 숭고한 희생에 대한 존경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면서 “바로 치유의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유방암 투병 중에 만든 첫 책
그는 “누구보다 분투하며 기록해 나갔을, 하지만 잘 팔리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외면받은 작가들의 글을 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파초출판이었다. 첫 책은 미국에 있는 친구가 소개하고 번역까지 해 준 ‘나의 펜은 새의 날개’였다. 지난해 6월 출간된 책은 영국 비영리재단 ‘언톨드’가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여성 작가들을 대상으로 공모해 선별한 단편소설의 모음집이다. 첫 책을 편집할 무렵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방사선 치료를 위해 요양병원에서 지냈는데, 핑크색 환자복을 입은 채 원고를 교정하고 거래처와 전화하고 디자이너를 섭외하고 책을 인쇄했다”고 했다.
두 번째 책은 최근 출간된 ‘여성과 전쟁’으로 2023년 러시아 미사일 공격으로 안타깝게 숨진 우크라이나 소설가 빅토리아 아멜리아가 남긴 미완의 원고를 묶은 책이다. 우연히 뉴스를 보다 작가의 죽음을 알게 됐고, 작가의 유고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영어 원서가 완성되기도 전에 계약하고 ‘이수민’으로 직접 번역도 했다. 그는 “첫 책을 냈을 때 투병 중이어서 하지 못했던 낭독회를 이번에는 동네 서점들과 함께 열고 있다”면서 “독자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어서 만족감이 크다”고 말했다.
멈추지 않을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일
그는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 모두를 함께 할 계획이다. 지난해 연희문학창작촌에 입주해 완성한 희곡 ‘안젤리나 졸리 따라잡기’가 오는 11월 무대에 올라간다. 유방암으로 가슴을 잃은 여성들의 실리콘 보형물 삽입을 통한 가슴 재건의 문제점을 다루는 극이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돼 수술 없이 치료를 끝냈지만 병원 입원 시절 주위 환자들이 겪는 일들을 극화한 것이다. 그는 “미국은 실리콘의 위험에 대한 정보 제공 이후 환자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보급하고 있지만 한국 암 환자들은 실리콘을 넣어도 암이 재발하지는 않는다는 정도의 말만 듣고 수술대에 오른다”며 안타까워했다.
내년부터는 그동안 실패를 거듭했던 필리핀의 경험을 토대로 장편 소설을 쓰는 데 집중할 예정이다. 그는 “한 집단의 실패이자 제 개인의 실패가 담긴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지난 6월에 필리핀 현장을 다시 찾았다는 그는 “그제야 희생자들의 죽음이 온전히 눈에 보이더라”며 “묘역에 흰 꽃을 놓으며 애도했고, 사죄드렸다”고 했다.
그는 ‘한국 출판계에서 자주 소개되지 않은 문화권 출신 작가의 글’을 계속 출간하고, 언젠가는 저개발국 작가들의 집필이나 출판을 돕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말했다. “열악한 출판 인프라 때문에 묻히고 마는 이야기들이 많을 것 같은데 책을 읽고 쓰고 만드는 과정에서 그들도 저처럼 치유의 경험을 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