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3500억 달러는 ‘선불’이라는 트럼프

입력 2025-09-27 01:10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한국이 미국에 투자할 3500억 달러(약 490조원)는 선불(up front)”이라고 못박았다. 한국의 관세 인하 조건으로 현금 직접 투자가 전제돼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대출·보증이 상당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는 우리 정부의 설명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 우려스럽다. 발언 직후 원·달러 환율은 심리적 저항선인 1400원을 넘어섰고, 주가는 급락했다. 한·미 관세협상은 단순한 경제 현안이 아니라 방위비 분담, 주한미군 감축 등 외교·안보와도 직결된 중요한 사항인 만큼 치밀한 전략으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실은 미국이 협상 과정과 달리 말을 바꿨다고 지적했다. 대출이 대부분이라고 판단했는데, 미국이 일본식 모델을 들어 현금을 받아 투자처와 수익 배분을 주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이재명 대통령은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에게 “일본과 한국은 경제·외환 여건이 다르다”고 반박했다. 앞서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선 “통화 스와프 없이 전액 현금 투자가 이뤄지면 한국은 1997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상황이 교착 국면으로 치닫는 가운데, 미국이 한국에 투자액을 더 늘리라고 했다는 외신 보도까지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미국 요구는 한국 경제 규모와 외환보유액 등을 고려했을 때 수용하기 어렵다. 만약 성사된다면 외환 유출과 환율 급등은 불가피하다. 한국투자증권은 2년간 3500억 달러가 유출될 경우 환율이 1579원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미 글로벌 달러 약세에도 유독 원화만 약세를 보이며 협상 불확실성이 선반영된 모습이다. 협상이 결렬되면 한국은 일본·유럽보다 불리한 25% 고율 관세를 적용받는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다음 달부터 미국 내 공장을 짓지 않는 기업의 의약품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한 것도 또 다른 악재다.

이 대통령은 베선트 장관과의 회동에서 ‘상업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양국 모두에 이익이 되는 방안을 찾자고 했다. 한국으로서는 통화 스와프 확보와 관세 인하가 절실하다. 협상 장기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 방한이 예정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중대 분수령이다. 관세 협상은 외교·안보 현안과도 맞닿아 있다. 미·중 정상까지 참석하는 국제 무대에서 한국이 소외되지 않으려면, 차분하면서도 세심한 대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