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MC 겸 코미디언으로 유명했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어느 날 MC를 보던 TBC ‘쑈쑈쑈’ 녹화장에서 화장실에 가는데 20대 청년이 따라왔다. 그 청년은 대뜸 “이거 원고는 누가 써요?”라고 물었다. “내가 쓴다. 왜?”라고 하자 “저… 다음부터는 제가 써 오면 안 될까요?”라고 되물었다. 곽규석은 선뜻 원고를 맡겼고, 다음 회에 그 청년이 써온 유머와 아이디어들이 방송을 탔다. 이를 계기로 희극 작가로 방송계에 발을 디디게 된 청년이 바로 전유성이다.
1969년 방송 작가로 데뷔한 그는 코미디언으로 전향해 ‘유머 1번지’ ‘쇼 비디오자키’에서 재치 있는 촌철살인 입담을 선보이며 시청자에게 얼굴을 알렸다. 특유의 어눌하고 느릿한 언변으로 온 국민을 웃겼다. 당시 유행하던 슬랩스틱 코미디같이 몸으로 웃기기보다는 곱씹어 생각하면 피식 웃게 만드는 개그와 풍자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전유성은 ‘개그맨’이라는 새 용어를 국내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익살을 뜻하는 영어 단어 ‘개그(gag)’와 남자를 뜻하는 ‘맨(man)’을 합친 것으로, 이 때문에 ‘개그맨 창시자’ ‘대한민국 1호 개그맨’이라는 애칭이 붙었다. PC 통신 시절 아이디가 ‘gagman1’이었을 정도다. 당시 코미디언이라는 익숙하고 널리 알려진 말을 놔두고 개그맨이라는 이상하고 듣도 보도 못한 표현을 쓴다고 선배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전유성은 ‘코미디 대부’로도 유명했다. ‘코미디 시장’이라는 코미디 극단을 운영하며 김대범, 안상태 등의 후배 개그맨들을 다수 발굴했다. 팽현숙을 발굴한 일화는 웃음을 자아낸다. “미국 코미디 프로를 보면 여자들이 진짜 예뻐. 코미디 프로에는 예쁜 역할도 필요한 거야”라며 팽현숙에게 코미디언 시험을 보라고 권유한 것이다.
스스로 스승이라 불리기를 거부했던 그가 향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폐기흉 증세가 악화하면서 숨을 거둔 것이다. 그의 이름처럼 하늘에서 유성으로 빛나며 편안히 여행하길 빈다.
김준동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