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이라면 이번 추석 명절은 여러모로 가족들 앞에 면이 서지 않겠다. 오랜만의 가족 모임에 설레는 기분도 잠시, 서로의 근황을 묻고 난 뒤 이어질 대화 주제엔 정치와 문화가 빠지지 않을 터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친척이 최근 발생한 목회자의 구속 사태와 교계 인사의 정치권 로비 의혹에 관해 은근슬쩍 물으며 “대체 왜들 그러는 것이냐”는 식으로 눈치를 줄 게 그려진다. 오랜만에 본 어린 조카들은 시종일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에 나온 노래 ‘소다 팝(Soda Pop)’을 읊조릴 것이 눈에 선하다.
최근 교계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침울한 듯하다. 광장도 모자라 설교 강단까지 치고 올라온 세속 정치는 교인들을 갈라치기 했다. 이념 논쟁 끝에 결국 한 목회자가 구속됐다. 지난 대통령 선거 등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사전 선거운동을 한 혐의다. 위법 논란은 차지하더라도 ‘도망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된 건 교계에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가 속한 교단은 ‘일정한 거주지가 있고 오랫동안 목회자로서 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그동안 조사에 성실히 임했다’며 법원의 구속 결정에 반발했다. 하지만 관련 뉴스에 달린 댓글 여론은 ‘교회는 뭐 신성불가침한 성역이냐’ 등 한국교회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런 평가를 보며 먼저 가슴이 아팠다. 목회자와 교회가 더는 사람들에게 신뢰의 대상이 아니란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그전부터 느꼈던 부분이긴 했지만 다시 한번 더 ‘팩폭’(팩트 폭력: 사실을 들이대 꼼짝 못 하게 함)을 당한 것 같았다.
집에 놀러 온 조카들이 노래 ‘소다 팝’을 흥얼거리는 모습은 크리스천의 머리를 더 아프게 할 법하다. 이 노래가 나오는 영화 케데헌은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한국 대중가요 여성 그룹이 사실은 악령들을 물리치는 사냥꾼이라는 설정이다. 지난 6월 20일 공개된 이후 전 세계적인 흥행을 일으킨 이 영화는 미국 애니메이션이지만 주로 한국을 배경으로 해 한류 열풍 역사를 다시금 써 내려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마치 갓을 쓴 저승사자 같은 모습의 남자 주인공이 노래하는 모습 등이 큰 인기를 끌며 한국의 무속신앙과 전통을 전 세계에 알렸다. 6년 전 저승사자 같아 섬뜩하다는 민원에 흉물 취급을 받고 철거됐던 세종시 정부청사 앞 금속 조형물이 케데헌 열풍에 힘입어 재설치를 검토받게 됐을 정도다.
며칠 전 교회 주일학교를 다니는 한 여덟 살 여자아이가 고민을 털어놨다. 교회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게 있다면 우상이라고 배웠는데, 자꾸 케데헌이 보고 싶고 영화 속 장면이 머릿속에 맴돌아 고민이라고 했다. 올여름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다룬 애니메이션 ‘킹 오브 킹스’가 흥행해 고무적이었던 게 불과 엊그제 같은데, 순식간에 주도권을 내준 것 같아 절망적이었다.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렸다는 자부심도 잠시, 크리스천으로서는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왔다.
최근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신천지와 통일교의 정치권 유착 의혹이 연일 불거지고 있다. 사법부의 엄중한 수사 칼날과 법의 심판은 관련 의혹을 받는 교주 등 이단 종교 지도부를 향하고 있다. 이는 그간 사이비·이단 종교의 척결과 교주의 엄벌을 원해왔던 교계와 이단 피해자들로서는 쾌재를 부를 일이다. 그런데도 마냥 좋아만 할 수는 없어 보인다. 정통교회 목회자와 사이비 교주를 별다른 차이 없이 보는 우리 사회 현실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이 괜히 교회를 향한 사회의 오해를 더 강화할 것 같아 우려스럽다. 기독교가 무속신앙이나 사이비 종교와 왜 다른지 사회에 보여줘야 할 때다. 쉽지 않겠지만, 부디 다음 설 명절엔 가족들 앞에 자랑스러울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