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서 메모 한 장을 발견했다. 나는 편지를 쓸 때 가급적 한 번 종이에 적고 다시 옮겨 쓰는 습관이 있다. 그날의 마음이 그대로 눌러 담긴 메모였다.
2022년 봄 강원도 횡성의 공근중학교로 특강을 간 적이 있다. 1학년은 9명. 그 작은 학교에 내 나름의 ‘구인회’를 결성하고 싶은 마음으로 기차에 올랐다. 서울에서 횡성까지는 멀었지만, 오지에서 자란 나는 학생들이 유난히 각별하게 여겨져 기꺼이 그 길을 갔다. 차창 밖으로 산머리에 벚꽃이 터지고, 논물이 봄빛을 받아 잔잔히 반짝이던 때였다. “벚꽃이 흩날릴 때 너희들을 처음 만났는데, 옥수수 잎사귀가 종아리에 닿을 즈음 헤어지게 되었구나.”
편지에는 내 시 ‘이마’의 한 구절도 적었다. “장판에 손톱으로/ 꾹 눌러놓은 자국 같은 게/ 마음이라면 / 거기 들어가 눕고 싶었다.”
그 시를 쓸 때 나는 외로움의 경사면에 서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상처의 그늘에 몸을 숨기고 싶었다. 그러나 시를 쓰면서 다시 일어날 힘을 얻었다. 손톱자국이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듯, 마음의 상처에도 회복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스스로 마음의 기척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 되라고. 그런 사람은 타인의 마음에 새겨진 자국도 섬세히 헤아릴 수 있다고. 이 시를 떠올리며 누군가 앓고 있을 때 조용히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를 짚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말했었다.
3년이 흘렀다. 그 아이들은 이제 고등학생이 됐다. 가끔 SNS에 올린 게시글에 ‘좋아요’를 누르기도 한다. 그 마음이 반갑고 애틋하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불리는 이름이 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은 조금 더 따뜻해진다.
논물에 비친 하늘을 보고 아름다움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의 손톱자국마저 삶으로 끌어안는 사람이 되기를. 언젠가 다시 만나면 웃으며 악수하자. 나도 그때까지 꾸준히 쓰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