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껴안고 속내를 주고받던 시가
아침에 제목만 벗어 두고 홀연히 떠났다
컴퓨터가 변심한 틈 사이로
한 번도 세상 구경한 적 없는 시들마저
일제히 행방을 감춘 이후
사는 게 빈 하늘 부여잡는 일
내가 바람의 그림자만 같아
자동 저장 설정으로
10초마다 한눈팔지 못하게 다독이고
수시로 나에게 메일로 건네
내 품을 잊지 않도록 저장한다
고장 빈번한 세상의 저장 공간
느닷없이 삭제되거나 분실될 것만 같아
나를 환경 설정하려고 고민하던 어느 날
문자나 메일로 밤낮없이 안부를 묻는 그들
휴지통에 버리고 수신 차단하지만
얼굴은 바꿔도 변심하지 않는 그들
자동 저장된 것은 나였고
누가 나를 은밀히 설정하고 있었다
-이중현 시집 '그대가 보이지 않는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