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다. 서울의 변두리 지역을 거쳐 간 인물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놀랍다. 그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이렇게도 풍성하게 담아냈다는 것이. 서울 사소문(四小門) 가운데 동남쪽 광희문(光熙門)을 나서면 ‘왕십리(往十里)’라고 일컬어지는 지역이 펼쳐진다. 조선 시대 한양 도성의 중심인 종로에서 10리(약 4㎞) 떨어진 곳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역사적 원형과 사라져가는 흔적을 탐사한 ‘오래된 서울’의 공저자로 참여했던 저자는 특별히 왕십리와 인연을 맺었던 22명의 삶을 다루는 색다른 열전(列傳)을 홀로 완성했다. 책 속에 담긴 인물들은 주로 밭작물을 재배하던 농경지 아니면 공동묘지가 있던 왕십리라는 특성과 맞물려 있다.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이병기는 1928년 동아일보에 실린 기행문에서 왕십리의 인상을 이렇게 적는다. “서울 부근에 광희문 밖처럼 쾌감을 주지 못하는 데는 없을 것이다. 다 먼지며 파리며 냄새며 묵은 무덤들에서 드러나는 해골 조각이며 쓰러져 가는 오막집 따위가 하나도 새롭고 깨끗한 맛은 없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옛 왕십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왕십리와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시대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인물을 대강 나누면 왕십리에 삶을 터전을 두고 살았던 사람들과 죽어 왕십리에 묻혔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왕십리에 살았던 사람들은 민중이었다. 저자는 “저잣거리에서 흔히 마주치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경우에 따라선 당대의 천덕꾸러기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주로 왕십리에 살거나 흔적으로 남겼다”고 말한다. 왕십리에서 나고 자란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신한승(1928~1987)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무예 가운데 하나지만 명맥이 끊겨가던 택견을 복원하고 체계화해 집대성한 인물이다. 사실 왕십리는 서울·경기 지방에서 택견이 성행한 지역들 가운데 한 곳이었다. 택견은 조선 시대 상민(常民)과 천민을 중심으로 전승된 ‘민중의 몸짓’이었기에 구전(口傳)에 의존하면서 제대로 된 기록이 없었다. 애초 레슬링 선수였던 신한승이 1956년 멜버른올림픽 국가대표선발전에서 결승까지 진출하고 아깝게 패한 뒤 어린 시절 경험했던 택견에 관한 관심을 되새기지 않았더라면 택견은 영원히 사장될 뻔했다.
임오군란의 도화선이 됐던 곳도 왕십리였다. 저자는 왕십리 사람 김장손(1820~1882)의 이야기를 통해 임오군란의 전말을 펼쳐낸다. 역사는 임오군란을 ‘임오년(1882년)에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밀린 급료에 불만을 품고 군제 개혁에 반대하며 일으킨 난리’로 설명한다. 구식 군대 무위영의 하급 병사였던 김장손의 아들 영춘은 13개월이나 밀린 급여로 받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고 그마저 양도 적은데 격분해 선혜청 관리들을 구타한 주동자 4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김장손은 아들의 구명을 위한 소장(訴狀)의 장두(狀頭·소장의 앞머리에 이름을 적는 사람)였다. 당시 구식 군대 하급 병사들이 주로 거주했던 왕십리 일대의 피해자 가족들을 상대로 사발통문을 돌리면서 연서명을 분주히 받아낸 김장손은 ‘반역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처형됐다. ‘민중의 언어’로 50~60년대를 풍미했던 만담가 장소팔(1922~2002)과 독립운동 동지였지만 해방 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적으로 맞붙은 지청천(1888~1957)·김붕준(1888~1950)과 얽힌 왕십리 이야기도 흥미롭다.
광희문은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렸다.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는 뜻으로 광희문으로 나선 시체들은 왕십리 일대 공동묘지에 던져지거나 묻혔다. 왕십리 이야기에서 죽음은 빠질 수 없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갑신정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궁녀 고대수. ‘궁중의 액막이’로 뽑혀 입궐한 고대수는 남자 5~6인은 당해낼 만큼 건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저자는 원로 여기자 최은희의 ‘한국 개화 여성 열전’을 인용해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처형된 고대수의 최후를 소개한다. “왕십리 청무밭쯤에서는 잔인한 여인들이 빗발치듯 돌멩이를 던져 골이 깨지고 뼈가 부서지고 유혈이 낭자하여 그대로 숨져 버렸다.” 저자는 ‘문학의 신’으로 불렸지만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홀로 왕십리 밭고랑에서 잠옷 차림으로 숨져 있던 김동인(1900~1951)과 왕십리에 주검으로 버려진 가톨릭 순교자들의 삶도 복원해 낸다.
왕십리 지역에는 인분(똥) 저장소가 즐비했다. 이병기가 “파리며 냄새며”라고 표현하고, 과거 왕십리 하면 ‘똥파리’를 떠올렸던 이유다. 저자는 박지원의 ‘예덕선생전’을 소환한다. 예덕선생은 사대문 안 사람들이 배설하는 인분을 모아 왕십리 등 채소밭에 공급하던 사람이었다. 당시에도 그리고 한동안 인분은 밭농사를 위한 중요한 거름으로 쓰였다. 박지원은 그 시대 똥장수를 더럽지만(穢·예) 덕이 있다 하여 ‘예덕선생’이라는 칭호를 바쳤지만 저자는 조선에 상업적 농업의 맥락에서 새 시대를 연 선구자로 예찬한다.
책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나와 다르지 않은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왕십리의 옛 모습은 사라졌고, 대신 신도시와 뉴타운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저자는 왕십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말한다. “과거의 사람과 장소를 오늘의 우리가 안아서 내일로 넘겨 줄 수 있다면 누가 왕십리를 죽었다 말할 수 있겠는가. 엄연히 살아 있는 왕십리의 발견, 그것이 오늘 우리의 자존심이자 내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다.”
⊙ 세·줄·평★ ★ ★
·몰랐던 왕십리의 놀라운 이야기
·글맛이 좋다
·역사는 내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