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제발 도서관은 놔둬라

입력 2025-09-25 00:33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모두 대내(大內·궁궐)로 들여오라.” “예로부터 사초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의 한 대목이다. 1498년 성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사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파문을 일으키자 진노한 연산군의 명령에 이극돈 등 사관들이 반대하는 모습이 담겼다. 조선시대에는 실록 편찬의 기본이 되는 사초는 왕조차도 볼 수 없는 전통이 확립돼 있었다. 왕이 사초를 열람하면 실록 편찬 임무를 담당한 사관의 독립성이 보장받지 못하고 사실이 왜곡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연산군은 사초를 직접 보지 않고 발췌본만 보는 선에서 타협했다. 폭군이었지만 역사의 평가가 두려웠던 연산군이 실리는 취하고 대신 ‘임금은 사초는 보지 않았다’는 명분을 얻은 셈이었다.

조선시대 사관과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도서관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서(司書)도 책 선정과 수집에서 자율성을 보장받았다. 기록을 보존하고 필사해 후세에 전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 중세 수도원 도서관에서도 필사 담당 수도사들이 어떤 책을 필사하고 보관할지를 자율적으로 정했다고 하니 그 기원은 꽤 오래됐다. 요즘 사서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훼손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이념과 성향에 맞지 않는 책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기가 도서관을 흔드는 일은 반복된다. 이재명정부가 들어선 뒤 기다렸다는 듯 논란이 됐던 보수 성향 단체 ‘리박스쿨’ 추천 도서를 ‘역사 왜곡 논란 도서’로 지정하고 공공도서관에서 폐기하겠다는 결정이 잇따르고 있다. 광주광역시가 선두에 섰고 다른 지역 공공도서관에서 따라가는 모양새다. 정근식 서울시교육감은 최근 한 방송 인터뷰에서 리박스쿨 관련 도서가 학교와 공공도서관에 비치된 것과 관련해 “서울시교육청 산하 22개 도서관에서 문제가 있는 도서를 전부 폐기토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정 교육감은 광복절을 맞아 SNS 메시지를 통해서도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거짓된 역사 인식을 심으려는 시도는 명백히 반교육적”이라고 지적했다. 윤석열정부 시절엔 일부 보수 학부모 단체로부터 공공도서관 성교육·성평등 도서를 열람 제한하거나 폐기하라는 민원이 쏟아졌고, 충남과 경기도 등에서는 민원을 받아들여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정권 차원에서 금서(禁書)가 만들어지던 과거와는 양상이 달라지긴 했지만 최근 사례들은 또 다른 외압이자 검열과 다름없다. 도서관은 민족과 인종, 종교적 성향,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나 공평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원칙을 모르거나 망각한 듯한 행위가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도서관인은 도서관 서비스를 제공함에 있어 자신의 편견을 배제하고 정보 접근을 저해하는 일체의 검열에 반대한다’(한국도서관협회·2019), ‘장서와 서비스는 어떠한 형태의 이념적, 정치적, 종교적 검열이나 상업적 압력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국제도서관협회연맹·2022) 등 국내외 선언문이 나온 이유일 것이다. 도서관에 가면 기대하는 게 있다. 모든 책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좋은 책’만이 아니라 ‘나쁜 책’도 말이다. 좋은 책과 나쁜 책의 기준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논어나 맹자 같은 유교 경전은 나쁜 책이었다. 누군가 나쁜 책이라고 말해도 그 책을 읽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누군가의 검열에 따라 도서관에 소장된 책들이 정해진다면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침해하는 일이다. 제발 도서관은 놔둬라.

맹경환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