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시민의식을 이야기할 때 꼭 등장하는 성경 구절이 누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를 돕는 마음과 태도이고, 또 하나는 유대인의 틀을 깨는 폭넓은 이웃에 대한 생각이다. 이것이 시민의 기본적인 소양과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선한 이웃’의 신학은 전통적으로 교회의 사회에 대한 태도로 정의돼 왔다. 특히 구제활동을 할 때 그 이름은 쓰임이 있었다. 사회봉사 단체 이름으로 ‘선한 사마리아인’, 즉 ‘굿 사마리탄(Good Samaritan)’이 많이 등장한다. 더 나아가 ‘선한 이웃’이라는 이름도 자주 쓰인다. 한국의 대표적 구호단체인 굿네이버스(Good Neighbors)는 그 이름의 영어 표현이다. 영어의 굿(Good)이라는 단어가 주로 ‘좋다’는 의미로 쓰였기에 우리는 종종 ‘좋은 이웃’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어감상 좀 부족하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선린(善隣)’이라는 단어도 쓴다. 역사가 좀 있는 봉사단체 중에 선린회란 이름을 가진 곳들이 있다. 그리고 교회가 선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도 있다. 이 역시 ‘착할 선’에 ‘이웃 린’을 쓴 한자 단어로 결국 선한 이웃이라는 개념이다. 이렇게 보면 이 단어는 상당히 폭넓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교회는 꾸준히 이 사회의 선한 이웃이 되고자 노력해 왔다. 사회의 약자를 돌보고자 했고, 가진 것을 나누어 주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이 이웃을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는가 묻게 된다. 이웃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공동체를 만들고 이웃을 대상으로 구제 활동을 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구제 활동을 통해 예수 믿는 이들을 더 얻고자 하는 조건부의 선함이 아니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선한 크리스천이 선한 이웃이 되지 못하는 누를 만든 것 같다.
사회에서 활동하며 자주 마주하는 벽은 종교에 대한 배제이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공모 사업에 참여해 보면 자주 붙은 조항이 종교단체는 배제한다는 것이다.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단체는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한 이웃이 되고자 하는데 정부나 지자체는 종교단체를 그 이웃으로 보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나는 이 표현을 볼 때면 ‘크리스천은 이 사회에서 시민이 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마주하는 것 같다.
가끔 축구를 보러 경기장을 방문한다. 국가대표 경기가 열리면 상암구장에 적게는 몇 천 명, 많게는 2만~3만명이 경기장에 운집한다. 그러면 경찰들이 나서서 주차를 돕는다. 주차장이 감당이 안 되니 경기장을 둘러서 도로변에 주차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준다. 경기장에 많은 시민이 모이니 당연하다.
그런데 주일에 예배당을 중심으로 주차가 되면 난리가 난다. 주민들 민원이 들어오고, 경찰이 단속을 한다. 축구 경기장에서 보던 그 모습과 너무 대조된다. 축구를 보러 온 사람들은 시민이니까 편의를 봐주는데,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은 시민이 아니라 여기니 단속 대상이 된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꼬집어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분명 크리스천이 시민의 범주에서 배제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선한 크리스천이 바른 민주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바르고 옳은 시민이 되기를 바란다. 그들을 통해 사회가 발전하고 좋아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사회도 교인들 역시 시민임을 인정해줬으면 한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권리가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하고, 사회의 논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선한 이웃이 되기 위한 서로의 노력을 기대한다.
조성돈 실천신학대학원대 목회사회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