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가장의 웃픈 생존극… 박찬욱 “선입견 없이 봐주길”

입력 2025-09-24 01:03
영화 ‘어쩔수가없다’로 전작 ‘헤어질 결심’ 이후 3년 만에 돌아온 박찬욱 감독. 그는 “한국 극장을 살려야 한다는 책임을 어깨에 짊어진 듯 막중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관객들이 적어도 ‘한국영화 재미있네’라는 만족감을 얻고 돌아가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CJ ENM 제공

25년간 제지 회사에 헌신해 모은 돈으로 마련한 단독주택. 평생 꿈꿨던 집 정원에서 어여쁜 아내 미리(손예진)와 두 아이를 위한 바비큐를 구우며 만수(이병헌)는 생각한다. ‘다 이뤘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돌연 해고 통보가 날아든다. 회사를 인수한 미국 본사 관리자에게 따져보지만 돌아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는 말뿐이다. 재취업에 나선 만수는 경쟁자를 없애면 되겠다는 위험한 계획을 세운다.

박찬욱(62)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인공지능(AI) 등 기술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소외되는 노동자의 비애를 다룬다. 그 방식이 무겁진 않다. 절박함에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괴로워하고 미안해하는 만수의 어리숙함이 씁쓸한 웃음을 안긴다. 우스우면서도 처절하게 슬픈 블랙코미디가 박 감독 특유의 황홀한 미장센을 바탕으로 펼쳐진다.

올해 베네치아영화제 경쟁 부문에 오른 영화는 외신의 한결같은 호평 속에 수상 기대감이 치솟았으나 무관에 그쳤다. 국내 개봉일인 24일을 하루 앞두고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박 감독은 “영화제 기간 중 전문가 점수에서 계속 1등을 했다. 다른 상은 몰라도 이병헌의 남우주연상은 꼭 받았으면 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어 토론토영화제 국제관객상 수상을 언급하며 “앞으로는 토론토만 가야겠다. 이제 ‘깐느박’ 말고 ‘토론토박’으로 불러 달라”며 웃었다. 영국 BBC는 “올해의 ‘기생충’”이라는 호평과 함께 평점 만점을 매겼다. 박 감독은 “중산층의 속물적 욕망과 계급 문제를 파고들며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곁들였다는 점에서 ‘기생충’과 비교될 만하다”고 말했다.

‘박찬욱 영화’에 대한 관객의 높은 기대치가 부담되진 않는다고 했다. 다만 작품에 관한 고정관념만큼은 떨쳐버리고 싶다고 했다. 그는 “성적인 묘사나 뒤틀린 이야기 등 변태적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거 같다. ‘늙은 변태’는 최악이지 않으냐”며 “그런 선입견 없이 신인 감독의 영화처럼 백지상태에서 봐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고 미소를 보였다.

주인공 만수의 극단적 행동에 대해 “그의 타깃이 되는 세 남자(이성민 차승원 박희순)는 만수와 비슷한 점을 공유하고 있다”며 “만수의 범행은 자신의 분신을 하나씩 제거하는,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파괴해 가는 행위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물의 행동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 이병헌이라는 호소력 강한 배우가 꼭 필요했다”고 덧붙였다.

영화는 만수의 행동과 관객 사이에 거리감을 끝까지 유지한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박 감독의 철저한 의도이자, 확고한 작품관이기도 하다. 박 감독은 “관객이 인물에 다가가고 물러서길 반복하면서 감정적·이성적으로 영화를 음미하고 궁극적으로 도덕적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이 내 영화 인생 전체에 걸친 목표”라고 말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