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대만의 해묵은 ‘역사전쟁’이 다시 불붙었다. 양측은 대만의 국제법적·역사적 지위를 둘러싸고 여러 차례 충돌했지만 이번엔 양상이 다르다. 대만 주재 미국대사관 격인 미국재대만협회(AIT)가 대만을 편들고 나서 미·중 간 역사전쟁으로 번질 조짐이 보인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지난달 15일 “80년 전 오늘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며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 등 국제 문서는 일본의 전쟁 책임을 명확히 하고 일본이 중국에서 훔친 영토를 중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흔들릴 수 없는 승리의 성과”라고 말했다. 중국은 1943년 12월 카이로 선언이 대만의 중국 반환을 명시했고,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이 이를 확인했으며 일본이 항복문서를 통해 카이로선언의 준수를 약속했기 때문에 대만의 주권은 중국에 있다고 단언한다.
대만은 이를 전면 부인한다. 린자룽 대만 외교부장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정치적 선언인 카이로·포츠담 선언보다 우선한다”며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대만을 중국에 할양하지 않았고 중국은 대만을 한 번도 통치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일본과 연합국 소속 48개국이 1951년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대만에 대한 일본의 권리 포기를 담고 있지만, 대만 주권의 최종 귀속처는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거론한 것이다. 반면 중국은 자국이 조약 당사국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조약 자체가 불법이자 무효라고 주장한다.
중국과 대만이 공방을 주고받는 가운데 AIT의 이메일 성명이 확전의 도화선이 됐다. AIT는 지난 15일 “중국은 카이로·포츠담 선언, 샌프란시스코 조약 등 2차 대전 당시 문서를 왜곡해 대만을 굴복시키려는 강압적 전략에 활용하고 있다”며 “중국의 주장은 명백한 허위로 어떤 문서도 대만의 최종 정치적 지위를 결정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미 국무부 대변인도 “AIT가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했다”며 지원사격에 나섰다. ‘하나의 중국’ 정책에 따라 중국과만 외교 관계를 수립한 기존 입장과 결이 다르다. 대만은 반색했다. 린 부장은 미국에 감사를 표하며 “대만과 중국은 서로에 예속된 관계가 아니며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대만을 대표할 권리가 없다”고 강조했다. 대만시보는 사설을 통해 “(미국의 언급은) 대만에 기회이자 도전”이라며 “미국의 지지를 통해 대만의 국제적 정당성과 외교적 공간을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대만 문제를 ‘레드라인’으로 여기는 중국은 강하게 반발했다. 린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7일 “미국의 일방적인 왜곡 해석”이라며 “국제법과 국제관계의 기본 원칙을 심각하게 위반하고 ‘대만 독립’ 분열 세력에게 심각하게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비난했다. 18일에는 둥쥔 중국 국방부장이 샹산포럼 연설에서 “대만의 중국 반환은 전후 국제질서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대만이 중국에 속한다는 역사적·법적 근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미국의 이번 언급이 대중국 정책의 변화를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미 국무부는 지난 2월 ‘대만과의 관계에 관한 팩트시트’에서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삭제했지만, 대만 독립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힌 적은 없다. 미국이 중국과의 정면충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의 중국’ 정책을 바꾸려 할지도 미지수다. 일각에선 미국이 대중국 협상용 카드로 대만 문제를 이용한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사실이라면 미국에 대한 신뢰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협상에 따라 대만을 내어줄 수도 있고 분리 독립시킬 수도 있는 거라면 우방이나 동맹도 미국 곁을 지키기 힘들다.
송세영 베이징 특파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