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안식월을 보내고 있다. 콜로세움과 포룸 로마눔 일대를 매일같이 거닐다 보니 고대 로마인들의 표정이 보이고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콜로세움에서는 흥분한 군중의 함성을 듣고, 포룸 로마눔에서는 청년 엘리트들의 야망 서린 눈을 본다.
로마의 귀족 청년들에게 최고의 성취는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돼 포룸 로마눔에서 개선식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이 야망을 품은 군사적 천재들의 경쟁은 로마가 세계적인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엔진 역할을 했다. 로마 역사에 숱한 개선식이 있었지만 로마의 중앙광장에 개선문을 남긴 이는 셋뿐이다. 첫 번째는 티투스 황제가 유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것을 기념하는 문이고, 두 번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파르티아 원정서 거둔 승리를 아들들이 기념한 것이고, 세 번째는 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이다. 셋 중 둘이 유대-기독교 전통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
광장 곳곳에 신을 위한 제단이 있다. 광장 중앙도로를 ‘거룩한 길(via sacra)’로 불렀으니 그들의 종교성은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는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해 주는 신에 대한 경외, 힘의 숭배였다. 비아 사크라를 따라 걷다 중간 지점에서 서남쪽 샛길로 들어서면 조그마한 예배당을 만날 수 있다. 관광객이 좀처럼 주목하지 않는, 성지순례라는 명목으로 여행하는 그룹도 대체로 지나치는 곳이다. ‘40인의 순교자 예배당’이다. 기독교인 병사 40명이 우상 제사를 거부하다 순교한 사건을 기념하는 소박한 공간이다.
주후 320년쯤 소아르메니아 지역 총독 아그리콜라우가 혹한의 겨울밤에 그리스도인 병사 40명을 얼어붙은 호수에 들어가게 했다. 그 옆에는 따뜻한 목욕탕을 마련해 놓고 지금이라도 그리스도 신앙을 포기하면 온탕에 들어갈 수 있다고 유혹했다. 병사들은 함께 찬송하고 서로 격려하며 버텼으나 추위를 견디지 못한 병사 한 명이 이탈하여 온탕에 들어갔다. 그러나 급격한 온도 차이로 즉사하고 만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을 감시하던 근위병 한 명이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고 얼음물에 들어간다. 다시 40명이 채워졌다. 그날 밤 많은 병사가 동사했다. 새벽까지 숨이 붙어 있던 이들은 다리 꺾기로 처형되고, 시신은 불태워 강에 던져졌다. 성도들이 몰래 그 잔해를 수습했고, 그들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제국을 가득 채웠다.
신기하게도 거대한 개선문과 승리의 제단으로 크게 기념되던 이야기보다 그 조용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야기의 발원지는 십자가였다. 가장 무력한 자리에서 가장 빛나는 희망이 생겨났던 이야기, 힘이 아닌 사랑, 정복이 아닌 포용, 움켜쥠이 아닌 내어 줌의 삶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침내 로마 전역에 울려 퍼지게 됐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의 일이다.
그런데 그 승리의 기념물이 개선문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이 개선문은 기독교적인가 로마적인가. 전쟁 승리를 통한 힘의 과시라는 로마의 정신을 구현하는 개선문이 기독교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가 될 수 있을까.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기독교가 여전히 십자가의 사랑을 중심에 놓을 수가 있을 것인가. 더는 핍박받을 필요 없이 당당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며, 사회 각 분야를 기독교적으로 변화시켜 나간 의미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러나 힘을 갖게 된 기독교가 자기희생과 비움의 사랑에서 멀어져 버린 역사 또한 반성하며 돌아봐야 한다. 세계는 지금 공존과 평화의 질서를 깨뜨리는 극단적인 자국이기주의 시대로 급속히 퇴행하고 있다. 그 중심에 유대-기독교 전통을 대변한다고 여겨지는 나라들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기독교의 명예가 땅에 실추된 오늘, 기독교가 십자가보다 개선문의 종교가 돼 버리지는 않았는가. 그리스도인은 처음부터 군사력과 경제력보다 사랑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 믿음은 어디로 갔을까. 어떻게 하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박영호 포항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