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의 견제 기능 약화시켜
정권 거수기 만드는 사법억제
민주주의 퇴행 경험한 나라들
천편일률적 패턴으로 진행돼
임의적 배당 원칙 훼손하고
사법부 독립 역행하는
민주당의 대법원 공격 멈춰야
정권 거수기 만드는 사법억제
민주주의 퇴행 경험한 나라들
천편일률적 패턴으로 진행돼
임의적 배당 원칙 훼손하고
사법부 독립 역행하는
민주당의 대법원 공격 멈춰야
‘사법억제’(court curbing)는 정치학에서 삼권분립을 논할 때 등장하는 용어다. 사전적 정의는 선출권력인 입법부나 행정부가 사법부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다. 사법부가 가진 견제 기능을 약화시켜 정권의 거수기로 전락시키려는 나쁜 의도에서 비롯됐다. 지난 5월 대통령 선거를 한달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후보인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확정판결 때 많이 나왔던 ‘사법자제’(judicial self-restraint)의 반대편에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권한을 남용하지 않도록 스스로 자제한다는 의미의 사법자제는 사법부가 지켜야 할 대원칙이다. 그렇다면 사법억제는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사법부 독립을 위해 삼권분립의 나머지 두 기관이 결코 범해서는 안 되는 금기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의 민주주의와 인권수호를 위해 결성된 유럽평의회(COE)는 폴란드 헝가리 등 회원국에서 입법부가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시도가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다. 폴란드에서는 보수·민족주의 성향의 정당 ‘법과정의(PiS)’가 2015년 총선에서 크게 이겨 단독 집권한 뒤부터 본격적인 사법억제가 시작됐다. 2016년 헌법재판소법을 바꿔 헌재의 위헌법률 심사권을 무력화했고, 2017년 사법위원회법을 개정해 법관 임면권을 가진 사법위를 의회가 접수했다. 대법원법을 개정해 퇴직 연령을 낮춘 뒤 대법관 22명을 쫓아냈고, 82명이던 대법관을 120명으로 늘려 빈자리를 친PiS 판사로 채웠다. 야당의 반대와 국제사회의 비판은 판사의 개인비리를 폭로하며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여론 몰이’로 대응했다.
헝가리의 사법억제는 아예 헌법을 바꾸는 방식이었다. 2010년 집권 후 여전히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정당 ‘피데스(Fidesz)’는 2012년 신헌법을 근거로 사법부를 장악했다. 이후에도 수시로 헌법을 개정해 국가부채가 국내총생산의 50%를 넘으면 그 기간 중 발의된 법안의 위헌 여부 심의를 금지하거나, 누구나 할 수 있었던 헌법소원 신청을 정부, 의회, 대법원장, 검찰총장으로 제한하는 규정을 헌법에 명시했다. 대법관 퇴직 연령을 낮춰 대법원을 물갈이하고, 법관 임명과 승진·징계 및 법원 예산을 총괄하는 ‘사법청’을 세워 대통령 측근을 청장에 임명하는 등 위헌법률 심사권을 무력화한 뒤 이뤄진 작업은 폴란드와 비슷했다.
굳이 동유럽 국가의 사례를 거론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입법부의 사법억제 시도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물론 위헌법률 심사권을 가진 헌재에 대한 강압적 장악은 없었다. 그러나 헌법재판관 9명 중 진보·중도 성향 재판관이 이 대통령이 임명한 2명을 포함해 6명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지난 4월 마은혁 재판관 임명까지 여야가 100일 넘게 치열하게 싸운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지금 타깃은 대법원이다. 현재 대법관 14명 중 윤석열정부에서 10명이 임명됐고, 이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 수가 전체의 과반이 되려면 4년을 기다려야 한다. 대법관 26명 증원을 담은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서둘러 추진하고, 헌법에 임기가 명시된(105조) 대법원장 사퇴를 공공연하게 요구하는 것에서 몇몇 동유럽 국가의 모습이 겹쳐보일 수밖에 없다.
가장 위험한 것은 사법부 독립의 출발점인 재판부 구성에 간섭하려는 시도다. 재판의 공정성은 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독립적 판사로부터 나온다. 그것을 오랜 기간에 걸쳐 시스템으로 체계화한 것이 임의적 사건배당이다. 그런데 민주당이 발의한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법안은 이를 아예 무시하고 있다. 특정 사건을 위해 이미 성향이 공개된 판사가 임명된다? 사법부 밖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형사재판을 진행할 판사들을 뽑는다? 선출권력이 우선이니 이 정도는 서열이 낮은 사법부가 받아들여야 할까. “사건 배당 절차에 국회가 좀 관여하겠다는데…”라는 말이 국회의원 입에서 거리낌없이 나오는 마당에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국회로 불러 청문회를 여는 것은 오히려 사소한 사건일지 모른다.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판결, 노골적인 재판지연, 고질적인 전관예우까지 바로잡아야 할 일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민주당이 하는 일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사법개혁이라고 결코 부를 수 없다. 동유럽 몇몇 국가를 비롯해 민주주의가 퇴행한 나라들의 전철을 답습하고 있을 뿐이다.
고승욱 수석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