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과거에 집착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후회하고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곱씹어 보면서 자책하기도 한다.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는 살아계실 때 더 자주 찾아뵈었더라면, 시험에 낙방하고서는 시험공부를 더 열심히 했더라면, 관계가 틀어진 사람에게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땅을 치고 후회하지만 지나가 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쓸어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지나간 일은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자. 마음속에 계속 회한과 미련의 찌꺼기를 쌓아두고 곱씹으며 자책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도 우리 영혼을 갉아먹는다.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원하는 직장에 취직을 못 하면 어떻게 하나. 집 전세 계약을 했는데 사기를 당하면 어떻게 할까. 가벼운 염려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경계해서 신중하게 결정하고 낭배를 막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친 염려와 근심은 하루하루 소중한 시간을 좀먹을 뿐이다.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걱정, 노후에 대한 걱정, 자식에 대한 걱정으로 시간을 낭비한다.
네덜란드 출신 예수회 사제이자 영성 신학자인 헨리 나우웬은 저서 ‘삶의 영성’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다음의 시편 구절을 세 번 반복해서 말해보라고 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의 뒷부분이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고 했다. 역설적으로 내게 부족한 것과 원하는 게 많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마음이 늘 불안하고 초조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우리는 현재에 집중하지 않는다.…우리는 미래가 너무 늦게 오고 있으니 빨리 오게 만들려는 것처럼 미래를 예상한다. 혹은 과거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 것처럼 과거를 회상한다. 우리는 너무 어리석어서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시간을 고민하고, 우리에게 속한 유일한 시간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와 현재를 수단으로 삼고 오직 미래만 목표로 삼는다. 행복해지기를 항상 계획만 하니 지금 행복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공감 가는 말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과거의 불행이나 행복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미래에 올 행복만을 그리며 살지도 말라며 현재의 작은 행복들에 만족하며 살 것을 조언한다. “과거의 행복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의 행복을 미루지 말라.” “생각의 서랍 중에서 한 개를 열 때는 다른 모든 것을 닫아두어야 한다. 그래야 무겁게 짓누르는 하나의 걱정거리 때문에 현재의 사소한 즐거움을 위축시켜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을 밀어내지도 않으며, 하나의 중요한 일을 걱정하느라 사소한 일들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마음의 평정을 찾는 네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정리할 것, 질투를 경계할 것, 큰 희망을 걸지 말 것, 세상에는 거짓이 많다는 점을 인정할 것 등이다.
생활의 염려도 죄다
후회는 우리를 과거 속에서 살게 한다. 염려는 우리를 미래 속에서 살게 한다. 과거에 대한 회한을 떨쳐버리고 미래에 대한 염려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보자.
유기성 선한목자교회 원로목사는 생활의 염려도 죄라고 말한다. 방탕함이나 술 취함보다 더 무서운 죄다. 염려하는 것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해결이 안 된 채 계속 염려하는데 이것이 더 큰 죄라는 것이다.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도 전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한평생 살고서 하나님 앞에 갔는데 하나님 나라를 위해선 아무것도 한 게 없다면, 일평생 죽을 때까지 염려하다 왔다면, 이는 마귀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염려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유 목사는 말한다.
우리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꼽히기도 했던 맥스 루케이도 목사는 저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에서 “염려는 죄 된 행동을 불러오기도 한다”며 “힘자랑이나 술 파티로 두려움을 누를 때, 화산처럼 분노를 쏟아낼 때, 우리의 두려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릴 때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독성이 강한 염려로 인해 배우자를 떠나거나 아이들을 방치하거나 계약을 파기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예수님도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눅 21:34)라고 말씀하셨다.
‘두려움이 내 삶을 결정하게 하지 마라’의 저자 브렌든 버처드는 행복한 아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을 떠올려 보라고 권한다. “호기심을 가져라. 기대를 버려라. 작은 것에도 즐거움을 느껴라.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봐라. 매 순간 즐겁게 몰입하라.”
헨리 나우웬은 서커스단 공중곡예사들에게 배운 신뢰에 대한 교훈을 이야기한다. 나우웬은 곡예사들이 우아하게 공중을 나는 모습을 지켜본 뒤 그들을 만나서 비결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곡예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비결은 공중을 나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붙잡아 주는 사람이 모든 것을 하는 데 있습니다. 내가 조(나를 붙잡아 주는 사람)를 향해 날아갈 때 나는 그냥 팔을 뻗고 그가 나를 붙잡아서 안전하게 반대편으로 데려다주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최악의 실수는 공중을 나는 사람이 붙잡아 주는 사람을 잡으려 드는 것입니다. 나는 조를 붙잡아서는 안 됩니다. 조가 나를 붙잡아야 하지요. 만약 내가 조의 팔목을 붙잡는다면 조의 팔목이 부러지거나 내 팔목이 부러지고 말 겁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끝장이에요. 공중을 나는 사람은 날기만 해야 하고 붙잡아 주는 사람은 붙잡기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중을 나는 사람은 붙잡아 주는 사람을 믿고 팔을 뻗어야 합니다.”
성경 속 염려와 위로
성경에도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나약한 인간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이들이 어떻게 염려와 불안을 극복했는지 보여준다.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후손을 주고 창대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나이가 들자 염려하며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100세에 사라에게서 이삭을 얻은 뒤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까지 순종하는 믿음의 조상이 됐다. 다윗은 수많은 시편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한 근심과 두려움을 토로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10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족속을 보고 두려움과 염려에 사로잡혔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불신과 염려를 퍼뜨렸고 그 결과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했다. 다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갔다.
예레미야는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눈물의 선지자라 불린다.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타락한 신앙으로 인해 염려하고 괴로워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렘 20:18)라고 탄식했다.
성경은 염려를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면서도 염려가 우리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한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마 6:26~27) 공중에 나는 새와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기르고 입히시는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전적으로 신뢰하라고 권고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우리를 짓누르는 염려는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의지하듯, 공중곡예를 하는 이들이 허공에서 자신을 잡아주는 상대방을 전적으로 신뢰하듯 하나님께 모두 맡기면 된다.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님께 간구하기만 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명희 논설위원·종교전문기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