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피터 위어, 1990)에서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 선생이 인용한 대사다. 영화는 졸업생 51명 중 75%를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에 입학시키는 웰튼학교에 키팅 선생이 부임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의 논리 그대로의 학교다. 오늘 우리처럼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다니면 선이지만 공부를 못하면 그것 자체가 악으로 여겨지는 학교였다.
키팅 선생의 첫 수업 시간이었다. 시(詩)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시간에 키팅 선생은 시의 정의를 적은 서론 페이지를 찢어버릴 것을 요청한다. 그 같은 요청을 하는 키팅의 이유는 분명했다. “시는 생명이고 존재이다. 시는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자에 넣어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때 시는 생명을 잃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이 세상이 정해 놓은 대로 무작정 따르는 것은 길들여지는 것이고, 그렇게 길들여질 때 생명 곧 자신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키팅은 답답했다. 이 세상에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성공할 수 있지만 오늘 우리 현실에서 보는 소위 엘리트들의 무너진 민낯을 보는 것처럼 키팅은 그런 시스템에 사는 아이들을 그냥 놔둘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르게 사는 방법을 가르쳤는데, 예를 들어 키팅은 수업 시간에 갑자기 교탁 위로 올라선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한 사람씩 자기처럼 올라와 보라고 한다. 그런 요청에 당황해하는 아이들에게 키팅이 그 이유를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단순하게 규정되고 도식화된 생각에서 벗어나 다르게 사물을 바라볼 것을 요청한 것이다. 옳다. 그래야 고통당하는 이웃이 보이고, 절망이 보이고, 이 세계의 빈곤과 폭력을 보는 눈이 열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키팅의 가르침은 분명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가둬놓고 사는 삶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며 가르치고 있었다. 키팅이 아이들을 역사 전시실로 데리고 갔을 때다. 그곳에서 키팅은 지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 싱싱했던 선배들의 사진을 보게 한다. 그때 그가 한 말이다. ‘카르페 디엠’. 번역하면 ‘지금을 붙잡으라’(Seize the day)는 뜻이다. 그러니까 ‘내일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우리 주님도 들꽃을 비유하며 그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 6:34) 들꽃에게 내일은 아궁이에 던져지는 날이지만 오늘은 아름답고 가장 찬란한 날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오늘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내일을 위하여 현재, 오늘을 희생시킨다.
겉으로는 주님의 가르침과 키팅의 가르침이 닮아 보인다. 그러나 위험한 차이가 있다. 단순히 오늘을 즐기며 다르게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영화 속 학생 닐 페리는 의사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뜻과 달리 배우를 꿈꿨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자 결국 생을 마감했다. 키팅의 가르침 속에 결핍된 한 조각 때문이다. 사실 주님이 말씀하신 자유와 오늘을 누리는 것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의 자유다. 그러니까 옳은 규범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자유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누리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닐의 죽음으로 키팅이 학교를 떠날 때, 학생들이 책상 위에 올라 “캡틴, 오 마이 캡틴”이라고 외친다. 감동적이지만 키팅은 중요한 것을 놓쳤다. 진리 안에서의 자유다. 오늘 우리도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특히 수능을 앞둔 아이들에게 진리이신 예수를 잠시 멀리하라고 하기도 한다. 진리를 떠난 공부의 시간은 아이들을 더 숨 막히게 만든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히려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배우도록 도와야 한다. 그 안에서만 오늘의 공부가 참된 자유로 이어진다.
하정완 꿈이있는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