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순교자

입력 2025-09-23 00:40

기독교는 스데반을 첫 순교자로 기억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는 공회 앞 설교 중 “메시아를 거부한 자들”을 꾸짖은 죄목으로 돌에 맞아 숨졌다. 마지막까지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며 자신을 죽이는 이들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초대 교회에서 시작된 ‘순교(殉敎)’의 범위는 근대 이후 신앙에서 신념이나 양심을 위한 희생으로 넓어졌다. 조선에서는 19세기 4대 박해 속에 김대건 안드레아·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한국 가톨릭 순교성인 103위’가 공인돼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사한 주기철 목사가 개신교 순교의 상징으로 기려진다.

순교자 호칭은 성스럽게만 쓰이진 않았다. 그 의미가 당대 권력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숨진 선교사 로버트 토머스가 대표적이다. 일부 교단은 “성경을 나누다 산화한 첫 개신교 순교자”로 기렸지만, 그가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에 섰다는 반론도 끈질기다. 황사영 역시 가톨릭 내부에서는 신앙의 모범으로 기려지지만 프랑스에 군대를 보내 천주교를 전파해달라는 ‘편지’를 보낸 사실이 모국 배신 행위라는 주장이 강해 순교자 명단에서 제외됐다.

어제 미국 애리조나 글렌데일의 경기장에선 총격으로 사망한 보수 청년운동가 찰리 커크를 위한 대규모 추모 집회가 열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를 “미국 자유의 순교자”라 불렀다. 커크는 미국 보수 진영을 결집시켰지만, 한편으로는 마틴 루서 킹을 폄훼하고 서구사회가 흑인으로 메워진다는 ‘대체 이론’을 전파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트럼프의 순교자 호칭은 증오 정치의 산물이라는 논란을 부르고 있다. 순교의 순수성은 죽음의 형식을 떠나 공동체가 그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그나마 그의 죽음을 둘러싼 분노와 보복으로 떠들썩한 추모 현장에서 유독 그의 유족이 건넨 스데반식 용서 한마디가 더 의미있는 메아리로 느껴진다.

이동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