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북의 한 주택가에 사는 70대 A씨는 올해 옥상 텃밭에서의 고추 농사를 사실상 포기했다. 예년 같으면 주렁주렁 열리던 고추가 올여름에는 좀처럼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A씨는 “30년 가까이 고추를 키웠지만 올해처럼 열매가 전혀 달리지 않은 건 처음”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멘트 옥상이 한여름 직사광선에 달아오르면서 작물이 뿌리째 타들어 간 탓이다.
퇴직 후 생계를 위해 지방 현장에서 일을 이어가던 60대 B씨도 ‘용광로 더위’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뙤약볕 속에서 사흘간 노동을 하다 결국 탈진해 병원을 찾았고, 링거를 맞고 나서야 겨우 몸을 추슬렀다. 그는 “실내 에어컨 밑에서 일하면서 돈을 번다면 큰 축복”이라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지구온난화가 불러온 기후재난은 먼 미래의 경고가 아니다. 우리의 일상과 생존을 직접 위협하는 가장 현실적인 위험이 됐다. 여름철 찜통더위는 야외활동 자체를 가로막고, 불시에 쏟아지는 폭우는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삶의 터전을 흔든다. 농촌진흥청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열대 기후 지역은 현재 10% 수준에서 2050년 55.9%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추세라면 ‘그늘 인간’(shade-seeker·그늘을 찾아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새로운 인간형을 설명하는 현실적 용어가 될지 모른다.
부동산 역시 기후 변화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이미 여름철 상권은 체감할 만한 변화를 겪고 있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으로 거리를 활보하기조차 부담스러운 날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소비자의 발길은 시원한 실내로 향하고 있다. 냉방이 잘되는 지하 상권이나 대형 할인점은 고객들로 붐빈다. 심지어 서울 여의도 IFC몰 같은 사무용 건물 내 지하상가는 새로운 ‘핫 플레이스’로 자리 잡았다. 반면 지상 상권이나 전통시장은 찌는 듯한 더위에 한산하기 일쑤다. 무더위가 여름철 상권 판도를 뒤바꿔 놓은 것이다.
주거지 선택에서도 기후 문제가 중요한 고려 요소로 떠오를 전망이다. 기습폭우에 따른 산사태, 산불 같은 재해 위험이 큰 지역은 피하는 게 현명하다. 아무리 풍광이 뛰어나도 골짜기 근처에 전원주택을 짓는 일은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전원생활의 낭만보다 재해를 피할 수 있는 실질적 안전이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또 지리적으로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입지가 주거 선호도를 결정짓는 새로운 기준이 될 수도 있다. 가령 서향보다 동향, 저층보다 중고층 주택의 가치가 높아질 수 있다.
앞으로 해안가 주변 땅이나 주택 매입은 더욱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을 고려해서다. 미국 마이애미에선 해안가에 살던 부자들이 침수 위험을 피해 중간 고지대로 이동하면서 원주민들이 저지대로 밀려나는 일(기후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난다. 대도시에서도 침수 위험이 큰 저지대보다는 구릉지대 주택 단지가 주목받을 수 있다. 이는 침수와 재해 위험을 어떻게 회피하느냐가 부동산 투자의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자연재해가 잦아지면 전원보다 도심이 상대적으로 안전자산처럼 여겨질 수 있다. 도시의 중심부인 만큼 집약적인 관리가 가능하고, 방재 인프라 확충을 통해 재난에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외에 나가지 않아도 각종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대단지 아파트는 더욱 인기를 끌 것이다.
이제 부동산은 기후와 분리해 볼 수 없는 자산이 됐다. 어찌 보면 인류가 마주한 이 거대한 위기는 단순히 적응을 넘어 삶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재설정하도록 요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