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 저항성 우울증’ 약제 경제적 취약층 접근성 제고를

입력 2025-09-23 00:13 수정 2025-09-23 00:58
자살 위험이 큰 치료 저항성 우울증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실질적 방안으로 콧속에 뿌리는 치료제의 건강보험 급여화 필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어도비스톡 제공

일반 우울증 환자보다 더 큰 위험
재발률 높고 의료비 많은 지출
1회 약값 70만∼80만원으로 비싸
전북, 해당 약제 치료비 지원 사업
건보 급여화·초기 적극 치료 필요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률을 낮추기 위한 국가·사회적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자살률은 오랫동안 세계 1위의 불명예를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자살 예방에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정책이라면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그중 하나가 자살 위험이 높은 중증 우울증 환자의 치료비 지원이다. 특히 기존 약물이 더 이상 듣지 않는 '치료 저항성 우울증'에 유일하게 허가된 약제에 대한 경제적 취약층의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치료 저항성 우울증 환자의 자살 시도는 일반 우울증 환자보다 7배 높은 것으로 보고돼 있다.

최근 코에 뿌리는 방식의 이 치료제를 처방받은 국내 환자들의 실사용 데이터(RWD)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전북 정신건강복지센터는 전국 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우울 및 자살 고위험군 대상으로 해당 약제의 치료비 지원 사업을 5년째 벌이고 있다. 일각에선 해당 치료제에 대한 의학적 근거가 쌓이고 있는 만큼,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지원 확산을 넘어 건강보험 급여화가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빠른 초기 치료로 환자들 생명을 지키는 동시에 우울증이나 자살로 초래되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 100명 중 4명 ‘치료 저항성’

우울증 치료의 모든 단계에서 자살 예방은 매우 중요하다. 2015년부터 9년간 자살 사망자 109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리부검 결과(보건복지부 2023심리부검 면담 보고서)를 보면 전체의 86.3%가 사망 전에 정신질환을 앓았을 것으로 추정됐고, 그중 74.5%가 우울 장애로 파악됐다. 2023년 기준 주요 우울 장애로 치료받은 인구는 100만명을 넘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데이터 기반의 한 연구에 의하면 국내 주요 우울 장애 환자의 약 4.17%가 치료 저항성 우울증일 것으로 추정됐다. 치료 저항성 우울증은 ‘2가지 이상의 항우울제와 하나의 비정형 항정신병 약물치료에도 반응이 없는 경우’로 정의된다. 국내에 이런 환자들이 4만명가량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치료 저항성 우울증은 일반 우울증보다 재발률이 높고 의료비를 40% 더 지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 약물치료로는 우울 증상이 거의 소실되는 관해에 도달하기까지 약 37~51일이 걸려 자살 충동에 즉각적인 대처를 기대하기 어렵다. 반면 2020년 국내 도입된 비강 분무형 치료제(스프라바토)는 치료 저항성 우울증 치료에 허가받은 유일한 약제다. 임상 연구에서 투여 후 24시간 만에 의미 있는 증상 개선 효과가 나타났고 4주 만에 52.5%의 관해율을 보였다. 콧속에 뿌리면 코점막 모세혈관으로 에스케타민 성분이 빠르게 흡수되고 뇌 신경전달물질 분비와 신경망 활동을 촉진함으로써 우울 증상을 개선하는 방식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치료 저항성 우울증 환자와 급성 자살 생각 또는 행동이 있는 우울 장애 환자 대상의 ‘혁신 치료제’로 지정한 바 있다.

한국인 실사용 연구 데이터도 속속 보고되고 있다. 원광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상열 교수팀의 최근 대한정신약물학회 학술대회 발표 논문을 보면 2021년 4월~2024년 9월 평균 3회의 에스케타민 분무제를 투여받은 38명을 분석한 결과 ‘해밀턴 우울증 척도’는 투여 전 26.1±5.9에서 투여 2주 후 20.2±6.8로 줄었다. 또 질병 심각도는 5.16±0.64에서 3.32±0.93으로, 자살 생각은 2.47±0.95에서 1.55±0.86으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감소세를 보였다. 우울 점수와 질병 심각도, 자살 생각은 1개월, 3개월 후에도 감소세를 유지했다. 치료 반응률은 39.4%였다.

이 교수는 22일 “치료 저항성 우울증이 기존 2가지 약물에 반응이 없음을 감안할 때 10명 중 4명에서 치료 반응을 보였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면서 “부작용은 어지러움, 뿌연 느낌, 구름에 탄 것 같은 해리 경험 등 순이었고 심각한 것은 관찰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 고대구로병원 등 국내 5개 기관에서 치료 저항성 우울증 환자 29명 대상(25명은 자살 생각 혹은 시도 경험)으로 해당 약제 사용 결과 우울 척도가 연구 시작 시점 대비 4주 후 유의미하게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울 척도 항목에는 기분, 죄책감, 불면증, 불안 등의 지표뿐만 아니라 자살 생각 평가도 포함돼 있다.

전북, 5년째 약제비 지원 ‘호평’

개원가에서도 이 치료제의 인지도가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 우울증이 악화돼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던 30대 여성은 자해와 자살을 수차례 시도하다 응급실로 실려간 적이 있다. 이 여성을 상담한 정동청 서울청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첫 면담에서 환자가 한 말은 ‘생지옥에 사는 기분이에요’였다”면서 “한 달간 치료를 진행한 뒤 우울감과 자살 충동 등이 현저히 줄었고 직장도 다시 다니는 등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 중이다. 요즘은 ‘새로 태어난 것 같다’는 표현을 자주 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 여성은 경제적 부담으로 더 이상 해당 약제 치료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비급여 약값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이 치료제는 질환 상태와 경과에 따라 치료 횟수가 정해지며 연간 수백만원까지 들 수 있다. 1회 약값은 70만~80만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북 정신건강복지센터는 선도적으로 도내 자살 생각 및 시도자, 우울 장애 환자를 대상으로 비용 지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1인당 3회 약제비로 연간 250만원 한도 내에서 지원한다. 2021년부터 최근까지 모두 54명이 혜택을 봤으며 치료 후 모두 기초 정신건강복지센터로 연계해 모니터링을 지속하고 있다.

전북 정신건강복지센터장인 이상열 교수는 “치료 저항성 및 급성 자살 충동 대상자에게 해당 약제가 정신적, 경제적 안정감을 제공해 자살 재시도율을 줄이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정부가 높은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심각한 우울증이나 자살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적절한 치료제를 쓰면 건강하게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데, 지원이 안 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백종우 정책연구소장은 “자살 위험이 높은 중증 우울 장애는 초기에 적극적인 치료를 통해 빠르게 위험 상황에 개입하고 지속적으로 관리·지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