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약물에 중독돼 몸이 망가진 내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결혼은 했지만 이런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제나 예상 밖이었다. 사람의 일과 달랐다. 지나고 보면 섬세하게 한 땀 한 땀 새겨 넣은 듯한 하나님의 일들이었다. 지금의 가정이 이뤄진 것도 그렇다.
예원이가 태어나 돌이 되었을 무렵 갑자기 공연 제의들이 끊기고 기름값조차 없어 차도 몰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도했다. “하나님, 돈이 없어요. 아이에게 뭘 해줄까요.” 그때 마음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노래를 만들어 주면 되잖아. 네가 할 수 있는 거잖아.” 나는 그 자리에서 기타를 들고 곡을 만들었다. 제목은 ‘축복의 선물’.
‘나 사는 동안 늘 변함없이 더 사랑하고 이해하고 안아줄게/ 내 곁에 계신 하나님 사랑 큰 축복으로 보내신 귀한 선물….’ 예원이는 자라면서 이 노래를 배웠고, 이 노래로 사람들을 축복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눈물이 났다.
예원이가 9살이었을 때다. “아빠, 공연하면 돈 많이 번다면서 왜 돈 안 주는 곳만 가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아빠는 아빠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야. 그 일이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 1년 뒤 가족 여행길 차 안에서 예원이가 다시 말했다. “아빠, 이제 알겠어요. 나도 커서 아빠처럼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할 거예요. 세계를 다니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거예요.” 그 말은 내 삶의 가장 큰 보상이었다.
예원이는 성장하면서 나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빠, 왜 펭귄처럼 걸어요?” 질문을 듣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방에 들어가 어떻게 얘기하면 좋을지 한참을 고민하다 식탁으로 돌아왔다. 그때 예원이가 말했다. “근데 아빠, 나는 펭귄 좋아해요.” 나는 울었다. 장애를 싫어했던 나는 이제 내 불편한 다리가 내 몸의 가장 소중한 일부가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었다. 아내의 말도 큰 힘이 됐다. “당신이 다리가 불편하다는 걸 별로 의식한 적이 없어요. 당신은 항상 밝고 자신 있어 보였으니까.”
물론 아빠로서 부족할 때도 많았다. 한 번은 괜히 예원이를 혼내고 후회했다. 그날 밤 기도하다 순간 잊었던 내 과거가 떠올라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누구를 정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셨다. 부모님의 사랑도 그랬다. “나는 모른다. 네가 사 준 가죽 점퍼밖에 기억 안 난다”던 아버지 말씀처럼 부모의 사랑은 모든 것을 덮는다.
돌아보면 목회자 가정에서 성장한 것, 교회에서 찬양 반주를 했던 모든 시간이 내 신앙의 기초였다. 비록 청년 시절 마약에 빠져 인생의 밑바닥까지 갔지만 결국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가족의 사랑 덕분이었다.
이제 나는 하나님만 찬양하며 사역 현장을 누빈다. 한국에서의 사역도 가족의 이해와 격려가 없었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늘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아내,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되어주는 예원이가 있기에 나는 다시 힘을 얻는다. 그들이 바로 나의 최고의 응원자다.
정리=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