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제 후계자? 부담 떨칠 방법은 연습뿐이죠”

입력 2025-09-22 02:08
흥국생명으로 이적한 이다현이 17일 경기 용인시 흥국생명연수원 체육관에서 네트를 망토처럼 두르고 배구공을 든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다현은 “성장에 대한 갈망으로 이적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용인=최현규 기자

지난봄 여자배구계를 뜨겁게 달군 이는 단연코 이다현(흥국생명)이었다. 일찍이 자유계약선수(FA) 최대어로 꼽힌 그의 행선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다현은 익숙했던 현대건설의 노란색 유니폼을 벗고, 라이벌 흥국생명의 핑크 유니폼으로 갈아 입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4강 신화를 지켜보며 배구선수의 꿈을 키운 11세 소녀는 어느덧 소속팀을 넘어 한국 여자배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흥국생명은 디펜딩 챔피언이자 지난 시즌까지 한국 여자배구의 간판 김연경이 소속돼 있던 구단이다. 성적과 흥행 모두 이다현이 짊어진 책임감이 막중하다. 최근 경기 용인시 흥국생명 연수원에서 만난 이다현은 구슬같은 땀방울을 흘리며 시즌 준비에 한창이었다.

이다현은 지난 시즌 프로 데뷔 이후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201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현대건설 지명을 받았다. 2021-2022시즌 주전으로 도약하며 해마다 한 단계 발전을 이뤄냈다. 지난해엔 속공과 블로킹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생애 두 번째 시즌 베스트7에 이름을 올렸다. 만족은 없었다. 이다현은 “내가 배구를 잘하고 있다는 생각을 여태껏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아직 멀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이런 생각이 그를 변화로 이끌었다. 이다현은 성장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지난해까지 6년 동안 줄곧 한 팀에서만 뛰었다. 문득 ‘내가 원하는 배구를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겼는데 선뜻 ‘YES’라는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며 “기술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싶었고, 변화를 통해 자극받고 싶었다”고 이적 결심의 배경을 털어놨다.

오랜 둥지를 떠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다현은 “입단 초 감독님의 믿음으로 어린 나이에 경기를 뛸 수 있었다. 전임 감독님 체제에서는 주전이 됐고, 수년간 함께했다. 나를 선택해 성장하게 해준 곳을 떠나려고 하니 발걸음이 무거웠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흥국생명 역시 변화의 소용돌이에 있었다. 그 과정이 오히려 이다현이 마음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흥국생명은 ‘우승 감독’ 마르첼로 아본단자(이탈리아)와 결별한 후 일본 출신 요시하라 토모코 감독을 선임했다. 요시하라 감독은 현역시절 1988년부터 2006년까지 일본과 이탈리아 리그를 오가며 뛰었다. 지도자로는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자국 리그 JT 마블러스를 이끌며 두 차례 리그 정상에 올랐다.

이다현은 “현대건설에선 한국 감독님께 지도받았고, 대표팀에선 유럽 감독님께 배웠다”며 “일본 지도자는 어떤 강점이 있을지 호기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어 ”선수들 사이에서 일본 배구는 기본기가 튼튼하다는 공감대가 있다. 세계 대회에서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지 않냐”며 “발전을 위해선 기본기를 완벽하게 갖춰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요시하라 감독이 같은 미들블로커 출신인 점도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다현은 “이적 과정에서 감독님과 한 시간 넘게 미팅을 했는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며 “감독님 지도하에서 세부적인 걸 섬세하게 보완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팀 훈련에 합류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미 차이를 체감하고 있다. 이다현은 “훈련할 때마다 나 스스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포인트를 매의 눈으로 짚어주신다. 피드백이 셀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서 훈련을 마치고 곧바로 복기하지 않으면 놓치는 게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감독님 열정이 엄청나다. 원하는 수준이 나오지 않는 날엔 어김없이 추가 훈련이 진행된다”고 말했다.

어느덧 프로 7년 차를 맞이한 그는 중고참에 접어들었다. 고참 선수와 신인급 선수의 가교 구실을 하며 팀의 허리를 지탱해야 한다. ‘FA 최대어 이적생’이라는 수식어 이면에는 다가올 시즌 그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냉정한 평가가 기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욱이 흥국생명은 디펜딩 챔피언으로 왕좌를 지켜야 한다. 김연경의 은퇴로 그가 뛰었던 아웃사이드 히터 포지션을 비롯한 팀의 전반적인 공격력을 어떻게 보완할지가 이번 시즌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흥국생명 유니폼을 입은 이다현이 17일 경기 용인시 흥국생명연수원 체육관에서 배구공을 옆구리에 낀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용인=최현규 기자

이다현은 “FA 계약을 맺은 이상 이제는 매 순간 결과로 증명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나 팀으로나 발전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어 “포지션이 공격수다 보니 공격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부족한 공격력은 조직력으로 메우기 위해 고참 선배들부터 나서서 팀 전체가 호흡 맞추기에 열중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가 부담을 이겨내는 방법은 ‘연습’뿐이었다. 이다현은 시즌을 앞두고 일상 패턴도 조정했다. 오전 7시30분에 기상해 오후 7시30분까지 식사와 통근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훈련에 쏟는다. 퇴근 후엔 숙소에서 그날 훈련 영상을 분석한다. 이다현은 “예전보다 훈련과 영상 분석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다”며 “사실상 하루가 잠과 식사, 훈련으로만 이뤄져 있다”고 했다. 오후 10시에 침대에 눕는 것은 반드시 지키는 루틴이다. 그는 “수면 시간이 보장돼야 회복이 빠르고 컨디션이 유지된다. 숙면을 방해하는 SNS 쇼츠나 시끄러운 노래는 피한다”고 덧붙였다.

이다현은 국가대표팀 재건이라는 과제도 짊어지고 있다. 한국 여자배구는 김연경의 은퇴 이후 꾸준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올해는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 강등이라는 최악의 결과까지 받아들었다. 2021년부터 5년 연속 대표팀에 선발된 이다현은 이 상황을 누구보다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국제 대회에 나가면 선수들 모두가 한국 여자배구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낀다”며 “시스템 문제는 제쳐두고, 선행돼야 하는 건 선수 개개인의 기량 향상이다. 나부터 분발해 세계적인 수준으로 기량을 끌어올리겠다”고 말했다.

내년 아시아 지역 대회가 3개 정도 예정돼 있다. 이다현은 “우선 아시아 무대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게 급선무”라며 “국내에선 컵대회와 리그 우승 등 나름의 성취를 이뤘지만, 국제 대회에선 아픔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도 대표팀의 반등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V리그 개막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다현은 “이번 시즌 1차 목표는 봄배구 진출이다. 그 목표를 이루고 난 뒤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겠다”며 “시즌을 마치고 ‘이다현을 잘 데려왔다’는 말을 듣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용인=최원준 기자 1j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