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프랑수아 바이루 프랑스 총리가 빚더미인 나라 살림을 고치겠다고 나섰다가 쫓겨나는 것을 보며 ‘재정 건전성’ 선언은 정치인이 직을 내려놓는 것과 동의어가 됐다는 것을 절감했다. 근래 주요 선진국 정부가 무너진 배경에는 재정 정책이 자리한다.
프랑스는 바이루 총리 실각 9개월 전에도 미셸 바르니에 내각이 긴축 예산안 처리를 시도했다가 실각했다. 일본도 재정 건전성과 기준금리 인상 기조를 펼쳤던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3차례 선거에서 모두 참패하며 초라한 퇴장을 앞두고 있다. 이제 국가 지도자가 재정 건전성을 외치는 것은 집권을 포기하는 지름길로 향하는 것이 됐다.
재정 건전성에 대한 반대 분위기는 재정 위기가 심각한 나라일수록 거세다. 흔히 한국의 국가부채 비율이 아직 괜찮다는 주장을 할 때 근거로 거론되는 것이 주요 7개국(G7)과의 비교다. 미국 일본 프랑스 캐나다 이탈리아 영국 등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100%를 넘는데 한국은 아직 50%를 밑돌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재정이 건전해서가 아니라 이들 국가 재정이 엉망이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65세 이상 프랑스 노인들이 받는 연금 수령액이 노동인구가 일해서 벌어들이는 소득을 뛰어넘었다고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분석해 보도했다. 분석에 따르면 이탈리아도 연금 수령액이 근로자 소득의 95%에 근접했고, 영국 일본 독일 캐나다 등도 70%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령화 사회에서 ‘확장 재정’ 열차에 올라탄 국가들의 선택지는 가속 페달을 밟는 것밖에 없다. 확장 재정의 맛에 길든 국민과 이들의 표가 필요한 정치권은 어느새 재정 중독에 빠져들고 열차의 속도는 점점 빨라질 수밖에 없다. 자칫 브레이크로 발을 옮겼다간 열차에서 쫓겨난다는 것이 프랑스가 보여준 선례다.
확장 재정 열차의 요금은 늦게 탑승하는 승객이 더 많이 부담하는 구조다. 국채를 연료로 찍어낸 데 따른 후과는 다음 세대가 짊어지게 된다. 미국 일본 등 기축통화국마저 국채 이자 부담 증가에 짓눌리는 상황에서 비기축통화국의 형편은 더욱 빠듯하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최근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강등했다. 프랑스 국채는 이미 회사채보다 더 헐값으로 떨어진 상태다. 프랑스 중앙은행도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0%에서 0.9%로 0.1% 포인트 낮췄다. 연금 등 복지 지출 증가에 따른 정부 부채 확대와 경제성장률 둔화, 재정 악화라는 악순환은 프랑스의 다음 세대가 짊어지게 된다.
한국도 확장 재정 열차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국가) 부채로 100조원을 만들었으면 이 돈으로 그 이상을 만들어내 얼마든지 갚을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은 그렇게 해야 할 때”라며 재정 역할을 강조했다. 재정을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 육성의 마중물로 삼으면 경제 성장과 세수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령화·저출생으로 연평균 6.3%씩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각종 연금·교부금 등 의무지출에 대한 정부의 구조조정 계획은 불투명하다. 돈을 빌려 수입을 늘리겠다는 구상은 있지만, 불어난 소비 습관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2025~2029년 중기재정전망’에서 나라 살림살이를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가 매년 100조원 안팎의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본다. 올해 GDP 대비 49.1%인 국가채무비율은 20년 뒤인 2045년 100%를 넘어설 전망이다.
그간 한국의 재정 열차는 한 줄의 안전장치에 의존해 위태롭게 달려왔다. 헌법 57조는 ‘국회는 정부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예산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고 명시한다. 이 한 줄을 근거로 예산 당국은 정부 예산이 정치권의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도록 마지막 브레이크를 밟는 역할을 했다.
전 세계적 확장 재정의 물결과 우리 국회의 여대야소 국면에서 한 줄의 브레이크가 얼마나 지켜질지는 의문이다. 절대다수 의석을 보유한 여당과 임기 첫해를 시작한 새 정부 사이에서 나라 살림의 브레이크는 당겨질 수 있을까. 폭주하는 재정 열차는 올라타긴 쉬워도 내리긴 어렵다는 것을 프랑스는 보여줬다.
양민철 경제부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