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보이는 자들을 보이게 하라

입력 2025-09-19 00:35

'출생미등록' 상태로 방치된
외국인 아동들… 이 땅에서
태어난 모두에게 차별 없어야

프랑스 한 병원에서 딸아이를 출산하고 퇴원할 무렵 프랑스 정부로부터 출생증명서(acte de naissance)를 받았다. 프랑스의 병원은 모든 아이의 출생을 정부에 통보하게 돼 있기 때문에 증명서가 외국인인 우리에게도 발급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먼 타국에서 태어난 것을 ‘추억’하는 문서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소위 ‘아이의 무국적 상황’에서 한 장의 증명서는 효력을 발휘했다. 남편이 멀리 떨어진 파리의 한국대사관에 직접 가서 출생신고를 했지만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여권 발급이 미뤄졌기 때문이다.

당장 여권 없이 방문한 소아과 진료는 출생증명서만으로 가능했다. 프랑스는 자국 영토 내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에게 국적과 상관없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사회복지와 돌봄 서비스, 의무교육을 제공하는데 프랑스 정부가 발급한 출생증명서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 서류였다. 그러나 단순히 생존에 필요한 서비스 일체만을 제공해 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통해 아이는 그렇게 자신의 첫 사람들과 첫 공동체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태어난 외국인 아이의 상황은 다르다. 우리 정부는 영토 안에서 태어난 아이 중 양부모가 외국 국적자이거나 엄마가 한국인 남성과 비혼인 관계에서 아이를 출산한 외국인 여성인 경우 아이의 출생신고나 등록과 관련해 어떠한 법적 의무를 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의 출생 등록 절차를 외국인 부모의 국가, 특히 엄마의 본국 책임으로 미뤄 온 것이다.

그러나 모든 외국인 아이에게 출생 등록을 받아주거나 출생을 증명해 줄 ‘모국’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망명자이거나 체류가 불안한 자 그리고 미혼모이거나 법적 지식이 낮은 경우 자국 대사관에 출생을 신고하기 어렵다. 2023년 감사원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병원에서 태어난 외국인 아동 중 출생미등록 상태로 파악된 아동이 4025명에 이르며,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연히 이 아이들은 의료 서비스나 보육 및 의무교육 등에 접근할 자격이 크게 제한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이 제한은 돈과 본질적인 연관이 없다. 혹시나 돈이 많은 망명자를 부모로 두고 있더라도, 그 자녀는 법적으로 존재가 증명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사회 서비스 제도에도 접근할 권리가 없다. 미등록은 사회적 존재성의 부재와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국회는 이주 아동의 출생을 증명할 수 있는 법을 모색해 왔다. 그러나 19대에서 22대까지 제출된 관련 법률안 중 어떤 것도 최종 문턱을 넘지 못했다. 뿌리 깊은 인종주의적 민족주의와 외국인 혐오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아이들을 ‘비가시적 존재’로 방치하게 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6월 여야 소속 의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외국인 아동 출생 등록의 새 방향을 논하는 국회 토론회를 열었다. ‘외국인 아동 출생 등록’을 전면에 부각했던 기존 법안들과 달리 ‘보편적 출생 등록’이라는 새로운 개념과 방안이 제시됐다. 외국인 아동의 출생 등록을 따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기존의 가족관계등록법을 개정해 대한민국 국민에게서 출생한 자녀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출생한 모든 외국인의 자녀에게도 차별 없이 가족관계등록부에 등재해 출생과 혼인, 사망 등의 가족관계 발생과 변동사항을 등록 및 증명하도록 하자는 취지다.

이 법이 결국 우리 모두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인구절벽에 맞서는 대안 중 하나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같은 땅에 태어나 같은 말을 하고 사는 아이들을 이미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분명 보이는 이들을 보이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불허하는 일이야말로 모든 이의 터전인 이 땅의 미래를 폭풍 속으로 밀어내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금세 성장하는 아이들의 마음에 서러움을 새기지 말자. 그들이 우리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니.

김혜령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