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52)씨는 20년 근무한 대형 건설사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 사내에서 문제 제기 후 원치 않는 퇴사를 경험하면서 ‘중증도 우울 에피소드’라는 정신질환을 앓게 됐다. 이씨는 지난해 6월부터 병원 치료를 시작했고, 올해 4월 근로복지공단에 정신질병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2월 “직장 내 괴롭힘이 이씨에게 정신적 고통을 줬다”고 인과관계를 인정한 만큼 빠른 처리를 기대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신청 3개월 후인 지난 7월 자신들이 지정한 병원에서 질병과 업무 사이 인과관계를 따지는 ‘특별진찰’(특진)을 받으라고 통보했다. 근로복지공단 안산병원은 지난 5일 예약이 밀려 있어 1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이씨에게 알렸다. 이씨는 “뉴스에는 대통령이 산재 처리 기간을 4개월(120일)로 줄인다고 나오는데 산재 병원이 없어 진찰을 1년 넘게 기다리라니 황당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실직 상태에서 병원비와 생활비를 부담하느라 연 17% 고리 대출에 허덕이고 있다.
이씨 같은 사례가 반복되는 근본 이유는 산재 병원에서 일하려는 의사가 없다는 점이다. 현재 정신질환 산재 특진이 가능한 근로복지공단 지정 병원은 전국에 안산병원 한 곳뿐이다. 원래 안산병원을 포함해 전국 6곳에서 정신질환 특진을 보도록 했지만, 나머지 5곳은 정신의학과·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임상심리사 등 채용에 어려움을 겪으며 관련 진료가 중단된 상태다.
근로복지공단이 특진 요구를 남발하는 경향도 산재 처리 기간을 늘리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근로복지공단 ‘정신질병 업무 관련성 조사 지침’은 “필요한 경우 특별진찰을 하도록 한다”고 규정한다. 특진이 필수가 아닌 셈이다. 하지만 이씨처럼 정부가 공식 인정한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도 특진을 받아야 하는 등 산재 신청자 절대다수가 특진 대상이 된다.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은 국민일보 취재가 시작되자 “이씨 사례는 공단 재해 조사 후 특진 없이 바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로 올리도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기준 정신질병 산재 처리 기간은 평균 223.8일로 근골격계(185.9일)나 뇌·심혈관(133.5일)보다 길다. 정신질환 산재 처리에 걸리는 시간도 2022년(188.2일) 이후 매년 늘고 있다. 정신질환 산재 신청·승인 건수, 정신질환으로 인한 자살 산재 건수 역시 최근 3년간 증가세다.
의료 인력 확충이 정공법이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정신과 의사 수 자체가 부족한 데다 이들은 산재 병원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일반 환자보다 훨씬 더 공이 많이 들어가는데 적정한 보상을 하는 시스템은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은 “정신질환 산재는 사회적 질병”이라며 “이들을 진료하는 의사는 질병뿐 아니라 환자의 사회적 여건까지 고려해야 하고 각종 행정 업무에도 시달린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특진 대상을 최소화하고, 대신에 특진 전 단계인 근로복지공단 재해 조사의 전문성을 강화하겠다”고 해명했다.
세종=황민혁 기자 ok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