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용 목사의 스티그마] 기준이 돼야 한다

입력 2025-09-18 03:02

‘퍼리(Furries)’라는 용어를 들어보았는가. 생소한 표현이지만 이제 곧 한국에서도 퍼리로 불리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퍼리는 수인(獸人), 곧 스스로 동물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자신이 진짜 동물인 양 행동하는 사람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학교에 개나 고양이 코스프레를 하고 등교해 자신에게 동물에 준하는 대우를 해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발생했다. 자신은 개라며 “멍멍”으로만 대답하겠다고 하거나 고양이로 분장해 고양이용 모래 화장실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한 하원의원은 공교육 기관이 자신을 퍼리라고 밝히는 학생을 포함해 드래크퀸(Drag Queen) 등 성적 선택과 지향에 공적 자금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출했으나 미국의 수정헌법 제14조(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법적 근거)에 의거해 통과되지 못했다. 그 의미는 퍼리도 성(性)을 스스로 결정하는 이들과 같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성 정체성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인정하는 세속의 물결이 스스로 동물이 되려는 선택까지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영국의 한 학교는 잔디밭을 ‘털이 있는 사람(퍼리)만 출입이 가능한 구역’으로 지정해 도리어 보통의 학생들이 잔디밭에 들어갈 수 없는 역차별을 자행했다. 곧 동물과 결혼하는 것까지 사회적 합의를 하자고 나서는 자들과 억지 토론을 해야 할 세상이 올지도 모르겠다.

기준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상대화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살아갈지라도 엄연히 지키고 보수해야 할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특별히 기독교의 신앙은 결코 이현령비현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송아지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눈에도 보이지 않는 신이 노예로 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고향에 돌려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굳이 그 약속을 믿고 고되고 험한 귀향길을 가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예수가 아니면 어떤가, 도덕적으로 착하고 선하게 살기만 한다면 이곳이 천국이 되고 좋은 곳에 가지 않겠는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에 대해 성경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성경은 “너를 위하여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출 20:4)고 했다. 시편 126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좋은 땅인 바벨론을 두고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해 고향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꿈꾸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사도 바울은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함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참된 인간됨을 깨닫게 된다고 증거했다.(롬 7:21)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는 반드시 기준이 있다.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온 변화무쌍한 역사의 진화 속에서 복음은 다양한 변수를 껴안으면서 여러 모양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부터 현재까지 믿음의 사람들이 동일하게 붙잡고 있는 기준 때문에 교회는 어둠과 죽음의 세상 가운데 빛이 될 수 있었다.

최근 한국교회는 복음의 상수와 변수 사이에 기준을 잃어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일련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와 이단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본질적 신앙을 잃어버리고 권력과 이념, 물질과 자기 우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 앞에 이름을 내고 자기 영광을 보이려는 이단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복음의 상수와 변수를 혼동시켜 버린 것이다. 남을 비판할 때는 선지자라도 된 것처럼 나서더니 정작 그 칼날이 교회와 목사에게 다가올 때는 탄압과 핍박을 받는다고 호소한다.

과거 세상은 기독교인에게 막연하지만 높은 도덕성을 기대했고 교회만큼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곳이라고 믿었다. 괘씸한 탕자도 넓은 가슴으로 품어 안아 주는 아버지와 같은 곳이 교회 공동체였고 어지러운 갈림길 앞에서 답을 찾아주며 품격 있는 삶의 정도를 알려주는 곳이 한국교회였다. 기독교 신앙 안에 세상과는 다른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준이라고 외치는 자를 보고 열과 줄을 맞춰가면 그 대열은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다. 기준이 없는 시대, 교회가 기준을 회복해 크게 외칠 준비를 해야 한다.

김주용 연동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