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지노박 (19) 믿음으로 귀국 결심… 눈물 대신 감사로 시작하는 하루

입력 2025-09-18 03:08
뮤지션 지노박이 2011년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미국 조지아주에서 세 살 된 딸 예원이와 생일 케이크 촛불을 불고 있다. 지노박 제공

언제부터인가 마음은 나의 조국, 한국을 향하고 있었다. 타국에서 오랜 시간 살았지만 사역 중에 만난 한인 교포들의 눈물을 보며 한국을 자주 떠올렸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저곳이 아닐까.” 기도할수록 그 생각은 커졌다. 이스트웨스트처치 담임목사님은 내가 아시아계 미국인을 위한 사역을 하길 원하셨다. 개척 인원과 예배당, 장비까지 지원하겠다는 제안은 솔깃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기도할수록 마음은 한국으로 향했다. 어느 날 예배 중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확신으로 찾아왔다. 결국 한국행을 결심했다. 비행기 표를 살 형편이 아니었는데, 내 상황을 아는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항공권을 사 주었다.

그렇게 2011년 오랜 타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왔다. 처음 한 달은 경기도 성남에서 혼자 지내며 사역했다. 곧 아내와 세 살 딸 예원이가 합류했다. 아는 목사님의 배려로 한 선교관에 머물며 생활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한국의 대중교통 노선은 복잡했고 다리가 불편한 몸으로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는 일은 큰 도전이었다. 엘리베이터 없는 역에서는 아이를 안고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종종 반대 방향 전철을 타기도 했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면 발목이 퉁퉁 부어 얼음찜질해야 비로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런데도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마치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온 사람처럼 비로소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작은 식사 한 끼에도 감사했다. 그 시절 눈물이 잦았다. 하지만 그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감사와 안도의 눈물이었다.

한국에서의 일정은 매일 빼곡히 차 있었다. 하루에 다섯, 여섯 건의 일정을 소화했다. 교회 병원 학교 복지관 노인회관 등 초청이 오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찬양사역자로 이름이 알려지면서 7년간 국내외를 누비며 사역했다. 김포로 이주한 뒤에는 김포시 홍보대사로도 활동하며 다양한 음악 프로젝트를 펼쳤다.

그런데 지방 교회를 순회하면서 나의 과거가 함께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떤 교회는 연주 일정을 취소했고 어떤 목회자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며 나를 면전에서 정죄했다. 그때마다 억울했지만 예수님처럼 입을 다물었다. 수많은 새벽을 눈물로 보냈다. 울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내 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평안을 주셨다. 시련조차 나를 빚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사실을 깨닫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충청도 산골의 작은 연합집회에서 다섯 명이 예수님을 영접했던 장면은 잊을 수 없다. 사례로 받은 매실 한 통은 우리 가족에게 큰 기쁨이었다. 시골 교회에서 받은 쌀 한 포대, 작은 정성 하나가 내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었다. 지방 집회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늘 지쳐 뒷좌석에 쓰러지듯 잠들었지만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때론 그런 내가 놀라웠다. “내가 어떻게 이런 삶을 살고 있을까.”

아무런 대책 없이 믿음만으로 귀국했지만 지금 나는 작은 교회를 돕고 세계 각국을 다니며 강의와 연주, 찬양 집회를 인도한다.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나를 변화시키고 그 삶을 새롭게 빚어가고 계신다. 이제는 눈물 대신 감사로 하루를 시작한다.

정리=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