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에너지 신산업, 가격 신호가 길을 연다

입력 2025-09-18 00:33

세계는 지금 에너지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점에 서 있다. 탄소중립 목표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반도체 등 미래 핵심 산업의 전례 없는 전력 수요가 맞물리면서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이고 경제적이며 친환경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 어젠다가 됐다. 이에 따라 에너지산업은 기존의 화석연료 기반 공급망을 넘어 분산된 재생에너지 및 유연성 자원을 통합하고 AI 등 첨단 기술과 방대한 데이터를 활용해 전력 수요와 공급을 최적화하는 지능형 시스템으로 진화하고 있다. 에너지산업의 혁신을 뒷받침하기 위한 투자 흐름도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40년까지 글로벌 에너지 투자(누적)는 약 12경원으로 크게 확대되고, 이 중 에너지 신산업·신기술 분야가 약 40.3%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러한 혁신의 중심에는 가격 신호가 제대로 작동하는 시장 메커니즘이 있다. 해외 주요국에서는 실시간 또는 시간대별로 변동하는 원가를 적절히 반영하는 요금 체계를 통해 에너지 시장 정보를 소비자와 기업에 투명하게 전달한다. 이러한 유연한 요금 체계는 에너지 관리 기술을 가진 기업들이 소비자의 전력 소비 패턴을 최적화하고, 이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가능하게 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에너지 스타트업 옥토퍼스에너지는 AI와 전력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가상발전소(VPP) 운영 기술과 유연한 요금제를 결합해 기후테크 유니콘으로 성장했다. 이는 적절한 가격 신호가 기술 혁신을 촉진하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반면 국내 에너지 신산업은 정부 지원과 민간 참여에도 불구하고 해외 수준의 활성화를 이루기에는 부족한 실정이다. 장기간 지속된 원가 이하의 경직된 요금 체계가 시장 참여자의 편익을 보장하고 혁신을 유도하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었다. 이는 수요 측면에서 소비자가 전력 사용을 조절하거나 효율을 높일 동기가 부족하고, 공급 측면에서 민간 기업이 기술 개발이나 설비 투자에 나설 유인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격 신호가 부재한 시장은 비효율을 초래하고, 궁극적으로 국가 에너지 시스템의 경쟁력을 약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에너지 전환은 돌이킬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이를 실현하는 힘은 기술 혁신과 가격 신호가 제대로 작동하는 시장 제도의 결합에서 나온다. 원가와 시장 상황을 반영하는 유연한 요금 체계는 국민에게 합리적 요금 선택권과 절감 유인을 제공하고, 기업의 투자와 혁신을 촉진하며, 국가 에너지 시스템의 효율성을 높이는 핵심 제도다. 이제 정부와 기업, 그리고 국민 모두가 이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동참해 에너지 신산업을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만들어가야 할 때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미래에너지융합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