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우리 안의 파시즘

입력 2025-09-17 00:38

반독재 저항 수단이었던 SNS
지금은 파시즘 매개체 역할도

정치권력의 전체주의화만큼
개인의 파시스트화도 우려
생각 다른 집단 악마화 문제

알고리즘이 증오와 맞물리면
민주주의 무시 수단 될 수도

주요 공공기관이 화염에 휩싸이고 알몸이 되다시피 옷이 벗겨진 고위 공직자가 시위대에 끌려 다니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정부의 무능력과 부패로 인해 쌓인 불만과 분노, 이른바 ‘네포 키즈’(nepo kids)로 불리는 고위층 자녀들과 서민층 청년들의 빈부격차 등이 배경이라지만 네팔 시위를 직접적으로 촉발시킨 것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접속 차단 조치였다. ‘Z세대’(1997~2012년생) 등이 이에 반발해 시위에 나서자 정부 주요 인사들은 물러났고 SNS도 곧 정상화됐다. SNS 차단이라는 파시즘적 횡포가 정치권력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된 셈이다. SNS는 오래 전부터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튀니지 벤 알리 정권의 24년 장기집권을 무너뜨린 2011년 ‘재스민 혁명’은 소셜 네트워킹의 힘을 보여줬다는 측면에서 ‘SNS 혁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더 이상 SNS는 독재에 저항하는 수단으로만 쓰이지 않는다. 지금 SNS는 불만을 추동하고, 선택적 공감을 통해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공격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파시즘의 오래된 정의에 포함된 민족주의의 의미를 배제한다면 SNS는 전 세계에서 파시즘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퇴임 후 펴낸 ‘파시즘’에서 SNS 확산을 경계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SNS 덕분에 소통이 확산된 것은 진보라고 할 수 있지만 SNS 활용이 늘어나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이 훨씬 강해졌고 이로 인해 파시즘의 싹이 잉태될 수 있다고 봤다. 그의 고민은 SNS를 적극 활용하며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던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우려에서부터 시작됐지만 헝가리 총리 오르반 빅토르, 폴란드 집권당 총재 야로스와프 카친스키도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그들은 공산정권에 항거했던 민주투사 출신이지만 권력의 정점에 선 이후 언론과 사법부를 장악하고, 반대파를 탄압했다. 내재된 파시스트의 모습까지 경계한 셈이다.

‘트럼프의 아들’로 불리던 우익 활동가 찰리 커크의 암살 사건에 대해 많은 이들은 이후 벌어질 트럼프 정부나 극우 세력의 ‘좌파 척결’식 행동을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암살자 타일러 로빈슨처럼 맹목적 신념을 가진 이가 극단적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경계해야 한다. 파시즘을 경멸했고 탄피에 파시스트를 증오하는 문구를 적어 놓았다고 해서 그가 파시즘에 저항한 투사는 아니다. 나의 믿음에 반하는 이를 악으로 여기고 공격하는 것은 파시스트의 행태이기 때문이다. 커크에게 총을 쏜 게 충분히 할 만한 행동이었다는 식으로 SNS에 글을 쓰고 떠들어대는 것은 극우 세력의 행동 양태와 다르지 않다. 커크의 활동 자체가 사건의 원인이라며 선후관계를 따지려 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파시즘에 반대하는 의도라 해도 반대파의 입을 막고 제거하려 드는 것은 파시즘과 다름없다.

올브라이트는 파시스트에 대해 “스스로를 국가 전체, 혹은 집단 전체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자”라고 규정했다. 문제는 정치권력을 가졌거나 정치권력을 지향하는 자들만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요즘은 SNS에서도, 길을 가다 들른 식당 옆자리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강변하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파시즘의 위험성은 정치권력 주변에만 있는 게 아니다. 상대를 향한 증오나 공격적인 생각이 SNS 알고리즘이나 포퓰리즘과 맞물리면 민주주의의 기본 규범과 절차를 무너뜨리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로빈슨은 스스로 파시즘을 증오한다고 믿었지만 그의 행동은 맹신론자의 살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좌파를 향한 극우의 공격을 우려하는 만큼 우파를 향한 공격이 무조건 정당하다고 믿는 확신도 걱정해야 한다. 약자라고 생각하며 감쌌던 이들이 알고 보면 그런 인식을 이용해 끔찍한 일을 저지른 범죄자일 수 있다는 것, 내가 공감을 보냈던 이들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일 수 있다는 점을 돌아봐야 한다. 내가 믿는 법과 제도가, 지지하는 정의가, 공감하는 대상이 지극히 정당하고 사회의 불완전성을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나의 생각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가 사라지면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된다. 생각이 다른 집단을 악으로 매도하고 내모는 태도, 그게 바로 파시즘이다.

정승훈 논설위원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