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도 노화도 빨리 진행되는 우주, 신약 개발 최적지

입력 2025-09-17 00:11
지난해 12월 미 항공우주국(NASA) 우주비행사가 노화 재료 실험을 위한 장비를 설치하고 있다. 이 장비는 1년 동안 우주 진공 상태에 노출된다. NASA 제공

우주에서의 미세중력이 찌그러진 인간의 정자를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재벌가의 혈통 잇기를 위해 정자를 우주로 보낸다는 설정은 드라마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올 초 방송된 tvN 드라마 ‘별들에게 물어봐’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어느새 친숙해진 우주라는 소재를 안방으로 끌어들였다.

우주 산업은 위성 발사, 달 착륙, 로봇 탐사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개발되고 발전하고 있다. 맥킨지는 전 세계 우주 산업 규모가 2023년 6300억 달러(약 875조원)에서 10년 뒤인 2035년에는 1조7900억 달러(약 2486조원)로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우주 산업이 ‘개척’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에서 진행하기 어려운 실험이나 인공장기를 활용한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바이오 산업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우주는 지구 표면보다 중력이 훨씬 약한 ‘미세 중력(microgravity)’ 상태다. 중력이 약해 우주 환경에서는 노화가 빠르게 오고, 신경이 퇴행하는 속도도 빠르다. 특정 병원성 박테리아는 우주에서 더 빨리 자라기도 한다. 이는 곧 암을 치료하거나 노화를 지연시킬 신약 개발에 시간이 덜 걸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암세포가 우주에서는 더 빠르게 자라고, 사람 몸도 지구에서보다 더 빨리 노화가 진행된다.

룩셈부르크의 바이오 스타트업 ‘엑소바이오스피어(Exobiosphere)’는 우주에 보낼 오가노이드 실험 장비를 개발 중이다. 우주에서 신약 임상시험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신약 개발은 통상적으로 10~15년이 시간이 걸리고, 2조~3조원가량의 투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막대한 시간과 비용 투자에도 신약 개발 시도의 90%가량은 실패로 끝난다. 약효가 기대했던 것만큼 충분하지 않거나, 예상치 못한 독성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수많은 실패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대안으로 우주가 떠오르는 이유다.

2017년 3월 유럽 우주국(ESA) 우주비행사가 우주정거장에서 미세중력 실험 연구용 인큐베이터에 단백질 결정을 보관하는 모습. NASA 제공

지난달 29일 찾은 엑소바이오스피어는 우주에 보낼 오가노이드 장비 개발에 한창이었다. 오가노이드는 우주 공간에서 원격으로 운용되는 엑소바이오스피어의 장비에 실려 우주에서 실험을 진행하게 된다. 엑소바이오스피어는 내년 1분기 내 민간 우주정거장에 실험실을 설치하고 신약 개발을 뒷받침한다는 계획을 세워뒀다.

엑소바이오스페이스와 협업하고 있는 룩셈부르크 국립보건연구원(LIH)의 권용준 박사는 “우주에서는 암도 더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특정 약물에 대한 저항성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며 “우주에서라면 도전적 연구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우주 바이오 분야는 우주 환경이라는 특수한 조건에 노출된 생물체나 오가노이드의 변화를 관찰해야 하기 때문에 지구 저궤도 우주정거장 내 실험장비를 활용한다.

엑소바이오스페이스는 우주에서의 오가노이드 시험 표준화와 자동화를 구상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우주에서의 시험 과정과 결과를 지구에서 확인할 수 있고, 시험 조건도 지구에서 조정할 수 있다. 우주비행사가 직접 조작하지 않아도 지구에서 원격으로 간단한 조작을 가능케 한다는 구상이다.

특히 노인성 뇌 질환이나 근육·뼈 손실 등 노화와 관련 있는 신약 개발이 우주 실험의 적합한 분야로 꼽힌다. 미세 중력 상태에서 노화가 빨리 진행되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지구에서 임상시험 하는 것보다 더 빠른 결과를 낼 수 있어서다.

권 박사는 “오가노이드를 전이성 암 치료에 활용해 6개월 시한부 환자가 27개월까지 살 수 있었다”며 “노인성 질환을 앓는 환자 상태를 세포 단위에서 유사하게 만들고자 한 연구는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주에서는 노화가 가속화되기 때문에 노인성 뇌 질환을 구현하기에 최적의 연구 환경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2017년 7월 미 항공우주국 우주비행사가 미세중력 환경에서 약물 효능을 연구하는 모습. NASA 제공

의약품 개발 과정에서 필요한 단백질 결정 확보에도 우주 환경이 적합하다. 지상에서는 단백질 결정이 잘 형성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미세 중력 환경에서는 중력의 방해를 받지 않고 고순도의 단백질 결정을 얻을 수 있다. 미세 중력 환경은 지상보다 단백질 결정 구조가 원활하게 형성돼 단백질 3차 구조를 정밀하게 해석할 수 있다.

우주에서만 가능한 실험 조건은 각국 제약·바이오 업계를 우주로 가게 했다. 미국 제약회사 머크는 항암제 ‘키트루다’의 제형 변경 실험을 우주 환경에서 진행했다. 이 실험을 통해 효율적인 대량 생산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스위스와 이스라엘의 합작 회사인 ‘스페이스파마’는 미세중력 환경에서 원격 제어 가능한 무인 소형 실험실을 만들어 운영한다.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도킹하지 않고 우주선을 타고 지구 궤도를 도는 방식이다. ‘마운자로’로 유명한 미국 일라이릴리 역시 비만과 당뇨 치료제의 제형 변경을 연구하기 위해 우주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영국 아스트라제네카는 ISS에서 신약 물질을 연구 중이다.

국내 기업들도 하나둘 우주로 향하고 있다. 보령은 지난해 미국 우주기업 액시엄 스페이스와의 국내 합작법인 ‘브랙스 스페이스’를 공식 출범했다. 브랙스 스페이스는 우주정거장 내 연구·실험 플랫폼 서비스, 한국인 유인 우주 개발 프로젝트, 우주정거장 모듈 공동 개발 등을 추진한다. 스페이스린텍은 우주 의학 연구를 통한 뇌 질환 진단과 치료 기술을 개발 중이고, 엔지켐생명과학은 우주 방사선 치료제를 연구하고 있다.

<용어설명>

미세 중력(microgravity): 지구 표면 중력의 약 1000만 배 이하로 매우 약한 중력 상태. 우주의 미세 중력은 노화를 촉진하고, 신경 퇴행을 가속화한다.

오가노이드(organoid): 장기(organ)와 유사(oid)의 합성어. 우리 몸의 실제 장기와 비슷한 3차원 구조물로, 시험관에서 배양해 만드는 인공 장기다.

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