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한화, 가을 야구의 결말은

입력 2025-09-16 00:38

지난 주말 서울 가로수길의 한 카페에 앉아 있는데 창밖으로 ‘한화 이글스 8번’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외국인이 지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화 이글스는 만년 하위권에 머물렀지만, 올해 KBO 리그 상위권에서 관중 1200만 시대를 선도하고 있다.

한화의 레전드 투수이자 단장을 지낸 정민철 해설위원은 “한화 팬들은 예전엔 집에서부터 유니폼을 입고 나오지 못하고, 야구장 앞에 와서야 꺼내 입곤 했다”며 “그런데도 늘 한결같이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그런 점을 떠올려보면 올해 한화의 반등을 보여주는 창 밖의 풍경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한화는 2018년 이후 7년 만에 그토록 꿈꿔 왔던 가을야구 진출을 확정지었다. 과거 한화가 가을에도 죽기 살기로 열심히 경기를 했던 때는 대체로 연패 내지는 꼴찌 탈출을 위해서였다. 2025년 9월 15일 현재 정규시즌 1위를 향해 희망을 품고 달리고 있다. 놀라운 변화다.

‘언더독’ 한화의 선전엔 야구 이상의 서사가 담겨 있다. 한화는 압도적으로 실력이 뛰어난 ‘전교 1등’ 같은 팀은 아니다. 팀 구성도 강점보다 약점이 많다. 감독과 코치진은 리그에서 60대로 가장 나이가 많은 편이고, 존재감 있는 몇몇 고참 선수들이 있긴 하지만 나머지는 20대 초반 어린 유망주들이 대다수다.

‘손이 많이 가는’ 선수들도 적잖다. 올 시즌 만루 상황에서 9타수 무안타를 기록하던 4번 타자는 최근에야 ‘만루 징크스’를 깼다. 고졸 루키로 프로에 왔지만 초반 적응에 실패, 마무리로 보직을 바꾼 뒤 맹활약 중인 클로저는 멘털 관리가 쉽지 않다. 고액을 주고 데려왔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투수와 타자,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빚고 복귀해 이제야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전 주장까지, 야구 만화 속 캐릭터 같은 사연이 넘친다.

이런 팀이 선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리그 최강 원투펀치로 꼽히는 외국인 투수 코디 폰세와 라이언 와이스의 활약이 있다. 신인왕 출신 문동주도 올해 데뷔 첫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하며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메이저리그 출신 류현진의 합류는 결정적으로 팀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선발 투수가 몸을 풀 때 나머지 투수들이 함께 지켜봐주고, 마운드에서 내려오면 더그아웃에서 허그로 격려하며, 원정 경기를 떠날 때도 선발 예정 투수가 따로 움직이지 않고 함께 이동하는 ‘원팀 스피릿’을 실천하고 있다.

타선에서는 주장 채은성의 성실한 리더십이 빛났다. KBO 리그를 대표하는 육성선수 출신인 그는 누구보다 성실한 훈련과 모범적인 자세로 야구에 임한다. 앞서 외국인 감독 체제에서 다소 느슨했던 훈련 분위기를 바꾼 건 솔선수범하며 빠짐없이 훈련하는 주장의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그가 연습하면 나머지 후배 선수들도 합류하면서 자연스레 훈련량을 늘렸다는 후문이다.

이런 인적 구성 위에서 감독과 코치진은 단단한 마운드를 중심에 두고 수비력을 높이며 최소 실점으로 승리를 꾀하는 전략을 구사해 왔다. 어린 선수들이 흔들릴 때마다 양상문·양승관 수석코치와 이지풍 수석트레이닝코치가 중심을 잡으며 이들을 다독이고 지켜 왔다. 팬들은 이제 김경문 감독과 코치진이 상대적으로 가을야구 경험이 없는 젊은 선수들과 함께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지켜보고 있다.

살다 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풀리지 않는 일이 있고,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언더독의 반란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도 인생에 한 번 기회는 오고, 빛나는 순간은 찾아온다. 꼴찌였고, 어제도 지고 오늘도 졌지만 “나는 행복합니다”를 외치던 낭만적 팬들의 이야기는 올 가을 어떻게 마무리될까.

김나래 문화체육부장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