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렵연합(EU)의 ‘2035년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 방침이 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유럽 시장에서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전기차 전환에 매달렸던 현대자동차·기아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배터리공장 직원 구금 사태와 고율 관세 여파로 미국에서 전략 변경이 불가피한 현대차·기아가 유럽에서도 예상치 못한 변수에 맞닥뜨리면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15일 외신 등에 따르면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지난 12일(현지시간) 엑스에 “우리는 탈탄소화와 기술 중립을 결합할 것”이라고 적었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3차 자동차 산업 전략대화’가 끝난 직후였다. 업계에선 그가 언급한 ‘기술 중립’이 자동차 산업의 탈탄소화 과정에서 전기차만 고집하지 않고 다른 해법을 검토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집행위는 내년으로 예정됐던 자동차 탄소 감축 계획 중간 점검 일정도 올해 말로 앞당기기로 했다.
EU가 100% 전기차 전환에 속도 조절 가능성을 내비친 건 유럽 완성차업체와 부품 단체가 이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자동차제조협회(ACEA)와 자동차부품협회(CLEPA)는 최근 집행위에 “2035년 내연차 판매 금지 방침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중국에 몰린 전기차 공급망과 미국의 무역 장벽도 과거와 달라진 난관으로 지목했다. 그러면서 탄소배출 저감 기술 활용이나 합성연료(e-fuel) 도입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애초에 EU가 내연차 판매 금지 조치를 내릴 때부터 유럽 완성차업계의 피해는 예상됐었다. 다만 국제사회 전반에 ‘산업’보다 ‘환경’에 대한 가치가 커지면서 업체들은 자동차 엔진을 모터로 갈아 끼우기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다. 그러다 올해 초 스웨덴의 배터리 스타트업 노스볼트의 파산으로 유럽 내 대규모 배터리 공급망이 사실상 붕괴하면서 위기감은 극대화했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자동차 배터리 제조사는 1~10위가 전부 아시아 기업(중국 6·한국 3·일본 1개)이다.
내연차 판매 금지 완화 분위기는 전기차 전환 로드맵에 따라 유럽시장 전략을 세웠던 업체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가장 빠르게 전기차 라인업을 구축한 현대차·기아 역시 이에 대해 반발하고 나섰다. 마르크 헤드리히 기아 유럽법인장은 최근 “우린 (전기차 전환에 대한) 준비가 돼 있다. 이제 와서 계획을 멈추면 수조원대 손실이 불가피하다”며 “이는 투자자와 소비자 모두를 배신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기아는 EV9, EV3, EV4에 이어 EV5와 EV2 출시를 앞두고 있다. 현대차는 유럽 전용 소형 전기차 아이오닉3를 내년에 투입할 계획이다. 자동차업계 한 관계자는 “전기차 전환은 ‘탄소 중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합의된 사안”이라며 “경영 상황이 불리해졌다고 이를 뒤엎는 건 손해를 감수하고 전기차 시대를 준비한 업체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말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