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V 사각’ 남아 접종 더 늘리고 9가 백신으로 전환해야

입력 2025-09-16 00:15
남아의 HPV 백신 접종 장면. 내년 HPV 백신 무료 접종 대상에 처음으로 12세 남자 청소년이 포함됐지만, 백신 접종 확대의 실질적인 효과로 이어지려면 추가 지원이 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어도비스톡 제공

10년 만에 남녀 필수 접종됐지만
9가백신, 4가보다 효과 20% 높아
지원 확대 위한 법안도 다수 발의
“저출생 문제 연결… 국가적 과제”

내년에 2014년생 남아 22만명이 HPV(사람유두종 바이러스) 백신을 국가필수예방접종(NIP)을 통해 무료로 맞게 될 전망이다. 접종 백신은 4가지 고위험 HPV 감염을 막아 주는 4가 백신으로, 접종 시기는 내년 2~3분기로 예상된다.

성접촉 등으로 감염되는 HPV는 여성의 자궁경부암뿐만 아니라 남성에게 항문암, 두경부암, 생식기 사마귀 등 위협 질환을 유발한다. 현재는 12~17세 여아와 18~26세 저소득층 여성에게만 NIP가 시행되고 있다.

15일 질병관리청과 의료계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발표된 2026년 예산안에 정부는 내년 HPV 백신의 NIP 예산을 기존 210억원에서 303억원으로 93억원 증액했다. 질병청 관계자는 “ 2014년 1월 1일~12월 31일 출생한 남성 청소년이 접종 대상으로 통계청 인구 추계상 약 22만명이 해당된다”고 밝혔다. HPV의 남아 접종 확대는 새 정부의 국정과제에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HPV 백신의 NIP 도입 10년 만에 ‘남녀 접종’이 실현되게 됐다. 그동안 HPV 백신의 국내 접종은 여성만을 대상으로 지원되며 성별 보건 형평성과 국제 사회와의 예방 격차 문제가 꾸준히 지적돼 왔다.

고위험 52, 58형 HPV는 9가 백신만 예방

HPV 접종 확대가 실질적인 효과로 이어지려면 추가적 지원이 강화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예방 효과를 고려한 고품질 백신으로의 전환이다. 주요 해외 국가에선 남녀 모두에게 9가 백신 접종을 NIP로 지원하고 있다. 9가 백신은 HPV 6, 11, 16, 18, 31, 33, 45, 52, 58형 등 9가지 바이러스를 예방해 4가 백신(6, 11, 16, 18형)보다 예방 범위가 넓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29개국이 남녀 모두에게 9가 백신 접종을 지원한다. 이는 9가 백신이 자궁경부암, 질암, 외음부암, 항문암, 생식기 사마귀 등 HPV 관련 암 및 질환을 최대 96.7%까지 예방하며 4가 백신 대비 20% 이상 추가 예방 효과가 있는 것으로 입증됐기 때문이다.

최근엔 두경부암 예방을 위해서도 HPV 감염 차단이 중요해지고 있다. 두경부암은 뇌와 안구를 제외한 코, 부비동, 구강, 안면, 후두, 인두, 침샘, 갑상샘 등에 발생하는 악성 종양이다. 흡연과 음주가 주원인이었으나 근래 남성에서 ‘HPV 양성 두경부암’ 발생이 크게 증가하는 추세다.

NIP 대상 남아의 연령을 추가 확대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오랜 기간 HPV 예방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남아의 경우 보다 적극적인 예방 정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질병청 자료에 따르면 2011년생 여아의 HPV 1차 접종 완료율은 79.2%였으나 남아는 0.2%에 불과했다. 호주(83.4%)와 영국(72.9%) 남아 접종률에 비하면 크게 뒤처진다. 한 연구에 따르면 HPV 퇴치를 위해선 남녀 모두에서 약 80%의 접종률이 이뤄져야 한다. 남아 지원 연령 확대는 성별 보건 형평성과도 연관이 있다. 내년부터 남녀 접종이 시행되더라도 여성에 비해 상당수 남성들은 여전히 HPV 예방 사각지대에 놓여있을 수밖에 없다. HPV 백신의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 기준은 4가의 경우 9~26세 남녀, 9가는 여성 9~45세 남성 9~26세로 돼 있다.

고려대 안산병원 산부인과 민경진 교수는 “내년부터 남아에게도 HPV 백신이 무료로 지원되는 것은 국내 HPV 예방 환경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다. 하지만 4가 백신만으로는 고위험군 예방에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내에 가장 흔한 고위험 바이러스들(52, 58형)이 9가 백신으로만 예방 가능하기 때문에 최근 개정된 대한부인종양학회 HPV 백신 권고안에서도 기존 4가 백신을 접종한 이들에게 9가 백신으로 재접종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면서 “남녀 청소년 모두에게 양질의 백신 지원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국회 예산안 심사에서 증액될까
게티이미지뱅크

HPV 백신의 추가 지원 확대가 향후 국회 논의 과정에서 성사될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다. 정부의 내년 예산안은 각 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감액, 증액 심사를 거쳐 오는 12월 확정된다. 현재 국회에는 12~26세 남녀 모두에게 HPV 백신 무료 접종(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여성 12~26세 남성 12~19세 지원 확대(박정하 국민의힘 의원), 26세 이하 남녀 모두에 지원(김미애 국민의힘 의원) 등 다수의 HPV 백신 지원 확대 법안이 발의돼 있다. 여야가 한목소리로 확대 필요성을 지지하고 있다. 21대 대선에서 양당의 공약이기도 했다.

또 지난해 말 2025년 예산안의 국회 심사 과정에서 정부는 편성하지 않았지만 보건복지위가 4가→9가 백신 전환과 남아 접종 확대 예산 278억여원을 증액했었다. 당시 정치 상황 등으로 결국 증액 예산이 반영되지 않아 최종 무산된 바 있다. 이번에도 여야가 뜻을 모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박희승 민주당 의원은 15일 국회에서 ‘HPV 국가접종 대상 확대와 고품질 백신 전환을 위한 정책 토론회’를 열었다. 박 의원은 “HPV 백신 접종은 단순히 암 예방 차원을 넘어 성매개 감염병 관리, 남성 청소년의 성 건강 증진, 난임 예방을 위한 저출생 문제 대응까지 연결되는 국가적 과제”라며 “남아 접종 확대와 9가 백신 전환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질병청 관계자는 “9가 백신으로 전환 시 예산 규모가 커져 재정 당국과 협의 조정을 거쳐 일단 남아 접종만 포함하고 백신 전환은 차차 검토키로 했다”면서 “4가 백신으로도 충분히 질환 예방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향후 예산 증액 관련 의원실의 관심과 활동을 지켜보겠다”고 덧붙였다.

질병청은 예산안이 현행대로 확정될 경우 백신 물량 확보, 고시 개정, 예방접종전문위원회 심의 등 절차를 거쳐 내년 2~3분기에 남녀 접종을 시작할 예정이다. 첫 남아 접종률은 50%를 목표로 하고 있다. 여아 접종률은 현재 80% 안팎이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