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욕조에 몸 담갔던 그녀, 스크린서 만난다

입력 2025-09-15 01:24

리 밀러(1907~1977)의 삶은 영화 그 자체다. 1920년대 미국 패션지 보그의 모델이던 그는 “찍히는 것보다 찍는 게 좋다”며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사진작가가 된다. 영국 초현실주의 예술가 롤런드 펜로즈의 연인이 돼 런던으로 이주한 그는 2차세계대전의 참상을 직접 카메라에 담기로 결심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가까스로 종군기자 지위를 얻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각종 군사시설 출입이 불허됐다. 밀러는 굴하지 않고 “그걸 왜 남자들이 정하느냐”고 당당히 따진다. 결국 포화가 쏟아지는 전쟁 한복판에 들어간 그는 여성의 시선으로 전쟁의 비극적 순간을 포착했다.

오는 24일 개봉하는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사진)는 그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밀러 사후 사진과 메모를 통해 모친의 삶을 알게 된 아들 안토니 펜로즈가 1985년 펴낸 전기를 바탕으로 했다. 참혹한 순간을 목도한 뒤 신경안정제로 버티던 밀러가 끝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모습은 전쟁의 그림자를 그대로 보여준다.

밀러가 남긴 메시지는 결국 ‘잊지 말자’는 것이다. 그가 촬영한 나치 강제수용소 사진은 1945년 6월 미국 보그에 ‘믿어라(Believe it)’라는 제목으로 실리면서 잔인한 학살 현장을 세상에 알렸다. 종전 직후 히틀러의 독일 뮌헨 아파트에 찾아가 욕조에서 목욕하는 자신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특히 주목받았다.

밀러를 연기하고 제작까지 맡은 배우 케이트 윈슬렛은 “밀러는 ‘살아 있음’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감 그 자체”라며 “무엇을 견딜 수 있고, 무엇을 이뤄낼 수 있는지 증명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러닝타임 117분. 15세 관람가.

권남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