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 협상의 후속 합의가 난항에 빠진 배경에는 미국의 ‘일본식 합의 모델’ 수용 압력이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일본이 관세율 인하 대가로 대미 투자 대상과 방식, 이익 배분을 미국이 주도하는 방식을 수용하면서 한국도 이와 유사한 조건을 받아들이거나 도로 ‘관세 인상’을 감수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여 있다.
정부는 미국 측의 일본식 합의 요구에 ‘수용 불가’ 입장을 고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14일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하며 미국이 일본식 모델 수용을 요구했는지 묻는 취재진에게 “일본 모델이라기보다는 어차피 관세 패키지가 있는 상태”라며 말을 아꼈다. 미국 측 요구를 모두 수용하는 걸 고려하느냐는 질문에는 “모두 수용한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고 일축했다.
미국과 일본이 지난 4일 서명한 ‘미·일 투자 양해각서’는 일본이 5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집행하되 트럼프 행정부가 투자 시점과 투자처 등을 주도하는 내용이 담겼다. 일본 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투자처를 선정하면 45일(영업일 기준) 내 미국이 지정한 특수목적기구(SPV)에 투자금을 넣어야 한다. 반도체·의약품·인공지능(AI) 등 미국 경제 및 국가안보 분야에 투자해 이익이 나오면 양국이 반씩 나누되 일본이 투자 원리금을 모두 회수한 이후엔 미국이 수익금 90%를 가져가는 내용도 담겼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은 최근 일본의 대미 투자금을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송유관 건설에 쓰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미국 측은 우리 정부에도 대미 투자금을 특수목적법인(SPC) 등에 현금으로 직접 투자해야 한다는 요구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이와 함께 농산물·디지털 등 분야에서도 비관세 장벽 해소를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 정부도 대미 투자 기업의 근로자 비자 문제 개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관세율 인하에 매몰되기보다 전체 국익을 고려한 합리적 결론을 도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송영관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현재 미국 측이 제시한 요구 사항은 우리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다”며 “당분간 자동차 관세 등이 높게 유지되더라도 신중한 협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일정 기간 협상 교착 상태는 불가피할 것”이라며 “대미 투자를 기업이 주도하는 유럽연합(EU)식 모델 등 절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세종=양민철 기자, 이종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