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 좋은 페이스메이커의 조건

입력 2025-09-15 00:31

지난달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세계 평화를 위한 조정 경험이 많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피스메이커’를 하면 자신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마라톤 등의 기록경기에서 신기록 수립이나 동료의 승리를 지원하기 위해 경기에 임하는 선수를 의미하는 ‘페이스메이커’를 자청한 이 대통령의 발언은 현재의 남북 관계 및 미·북 관계 구도를 생각하면 분명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다.

2023년 12월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선언한 뒤 남북 관계의 대립과 단절만을 추구해온 북한이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에도 미·북 정상 간의 관계는 “나쁘지 않다”고 강조하면서도 우리와의 대화 가능성을 한사코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 하프마라톤에서는 페이스메이커의 미숙한 경기 운영으로 우승자를 비롯한 4명의 선수가 메달을 박탈당하고 기록도 삭제됐다. 국제 관계에서도 페이스메이킹이 잘못되면 행위자 간의 불신만을 조장하고, 북한과 같은 트러블메이커의 그릇된 자신감과 오만함을 키워 대화나 비핵화 과정 자체를 망칠 수 있다. 그렇기에 좋은 페이스메이커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좋은 페이스메이커는 개인적 욕심보다는 철저히 공통의 가치와 목표에 충실해야 한다. 대화 재개나 남북 교류협력 활성화는 한반도 안정과 남북 공존, 그리고 평화적 통일을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완전한 북한 비핵화’ 등 한·미 양국이 북한과의 대화나 협상을 통해 이룩하고자 하는 목표를 분명히 설정하는 한편, 북한의 반발과 관계없이 이를 꾸준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

2019년의 ‘하노이 노딜’ 이후 트럼프 행정부의 신중한 접근이나 북한의 무대응과는 달리 우리만 ‘종전선언’에 집착했던 사례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둘째, 동맹 및 유사 입장국과의 공조와 협력에 중점을 둬야 한다. 페이스메이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동료와의 신뢰와 공감대이지 일반적인 평판이 아니다. 외교적 페이스메이킹에 있어서도 확실한 무게중심은 있어야 하고, 기계적 균형은 오히려 누구로부터도 환영받거나 신뢰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지난달의 한·일 및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확인된 한·미·일 공조와 한·미동맹의 결속은 그대로 유지돼야 하고, 한·중 관계나 한·러 관계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이 원칙이 번복되거나 희석됐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셋째, 우리 자신의 능력 향상이다. 우리나라의 마라톤 영웅이었던 황영조 선수나 이봉주 선수도 과거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페이스메이커는 전체 경기의 조정 기능을 원활히 하고 필요할 경우 자신이 직접 선두로 나설 수도 있는 역량과 태세를 갖춰야 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페이스메이킹에 있어서도 우리 자신의 군사적 대응 능력을 꾸준히 강화하는 한편 한·미 연합 대비태세와 미국의 실물적 확장억제 공약 강화를 끌어내야 한다. 양방향 소통을 통한 국내 여론 결집을 이룸으로써 대북·통일 정책의 추진력도 확보해야 한다.

지난 3일 개최된 중국의 전승절 80주년 열병식 행사에서 베이징, 모스크바, 평양이 반미·반서방 연대의 결속을 과시한 것은 우리의 페이스를 흐트러뜨리겠다는 계산도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조급해하지 않는 평정심, 그리고 원칙과 실용의 조화가 필요하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