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와 집회를 위해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나는 점점 유명해졌다. 각지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다녔고, 팬클럽까지 생겼다. 비행기를 타고 주에서 주로 이동하고 호텔 생활을 반복했다. 연주가 끝나면 함께 사진을 찍자고 줄 서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어깨가 으쓱했다. 한국·일본·중국·베트남까지 사역 무대가 넓어졌다. 짧은 시간 안에 이뤄진 변화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전의 나를 지우고 더 멋진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연습하고 더 감동적인 무대를 만들기 위해 나 자신을 채찍질했다. 가는 곳마다 맛있는 음식과 좋은 숙소가 준비돼 있었고 어느새 나는 ‘대접받는 찬양사역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화려한 무대 뒤, 호텔 방에 홀로 앉아 있을 때면 마음 한편이 시리고 텅 빈 듯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위해 찬양하는 걸까.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건 아닐까.” 이런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예배 시간에도 진심으로 찬양하기보다 사람들의 반응을 먼저 의식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애틀랜타로 사역지를 옮기고 대형교회에서 음악 감독으로 섬기며 결혼까지 했지만 공허함은 점점 깊어졌다. 안정된 사역과 가정, 더 넓어진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약에 대한 갈망이 찾아왔다. 나는 또 무너졌고 심지어 사역 중 마약에 손을 대기까지 했다.
결혼 생활 3년 만에 결국 가정도 깨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떠났다. 이혼 후의 삶은 막다른 길 같았다. 10년 넘게 교회 사역만 해온 나는 다른 일을 할 줄 몰랐다. 인간관계와 재정이 모두 끊겼다. 사람들의 시선과 뒷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저런, 찬양 사역자가 망가져서 쯧쯧….”
나는 하나님께 절규했다. “주님, 저는 사역자를 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원래도 아니었고 지금도 아닙니다. 이제 열심히 돈만 벌어 헌금이나 하겠습니다. 제발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나에 대한 불신은 더 격한 반항으로 이어졌다. “저를 포기해 주세요. 신실한 사람들 많잖아요. 나는 제 길을 가겠습니다. 이제는 지쳤습니다. 처음부터 안 되는 길이었는데 왜 저를 안 놔주시나요.” 어쩌면 그 반항의 진심은 ‘주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제 손 좀 꼭 잡아주세요’라는 간절한 외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환경을 탓하고 사람을 원망했다. 내 안의 주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다시 시작한 마약은 더 무서운 공포를 몰고 왔다. 약을 해야만 버림받은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끝없이 또 자책했다.
‘나는 왜 또 이 길을 가는 걸까. 다윗도 용서하셨다는데 왜 나는 안 되나.’ 한동안 멈췄던 중독은 순식간에 나를 점령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것 같았다. 기도하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신음만 흘리며 바닥까지 떨어졌다.
그런데 한순간 메마른 내 마음에 아주 작은 물방울 같은 위로가 떨어졌다. 오랜 태풍이 지나간 뒤 찾아오는 고요처럼 내 안에 잔잔한 평안이 스며들었다. 나는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내 안에 아주 작은 희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정리=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