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투자 ‘서명’ 압박하는 美… 국익 지켜내야

입력 2025-09-13 01:10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 로이터연합뉴스

일본은 지난 7월 우리보다 먼저 미국과 관세 협상을 타결하며 악수를 했다. 상호관세와 자동차 관세를 15%로 낮추는 대신 5500억 달러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하지만 악수 후에도 관세는 낮아지지 않았다. 후속 협상 끝에 일본이 미·일 투자양해각서에 서명한 뒤인 지난 4일에야 트럼프는 대일 관세 인하 행정명령에 사인했다.

악수를 문서화한 그 각서는 난해하게 적혔지만 뜯어보면 ( )와 같은 뜻인 문장들로 채워졌다. ①투자 시점은 2029년 1월 19일까지 수시로 진행되며 미국 대통령이 투자처를 정한다(투자는 트럼프 임기 종료 전에 마무리돼야 하며 용처는 트럼프가 정한다). ②투자처 선정 후 45영업일 안에 일본은 미국이 지정한 계좌에 즉시 사용 가능한 자금을 제공한다(트럼프가 투자처를 정하면 일본은 두 달 안에 현금을 입금한다). ③각 투자를 위한 특수목적법인은 미국이 정한 자가 관리한다(돈은 일본이 내지만 그 관리는 미국이 하겠다). ④투자 수익은 일정 기준까지 양국 절반씩, 그 후엔 일본 10%, 미국 90%로 분배한다(일본이 투자금을 어느 정도 회수하면 미국 자산이 된다). ⑤일본이 각서를 이행하는 동안 미국은 관세를 인상할 의도가 없다(일본이 입금하지 않으면 관세로 보복할 것이다).

한국은 관세를 15%로 낮추는 악수의 대가로 5000억 달러(관세 협상에서 3500억 달러, 정상회담 과정에서 1500억 달러) 투자를 약속했다. 경제 규모에 비춰 과한 액수였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11일(현지시간) “한국도 각서에 서명하거나 관세를 내거나 해야 한다”는 양자택일을 말하며 압박했다. 일본이 서명한 것처럼 트럼프 임기 중 ‘현금 인출기’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흑백은 분명하다”면서 다른 선택지는 없을 거라고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이런 요구를 받아들일 현실도 명분도 우리에겐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일본처럼 기축통화를 가진 것도 아니고, 4000억 달러 남짓한 외환보유고를 그렇게 썼다간 경제가 거덜 날 터인 데다, 수익을 고스란히 내줘야 하는 천문학적 투자를 민간 기업에 강요할 수도 없다. 더욱이 제국주의 시절의 불평등 조약을 연상케 하는 문서여서 과연 국익에 부합하는지 어느 때보다 면밀히 따져봐야 할 사안이다. 미국은 힘을 앞세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 그에 맞서 합리적 접점을 찾아내야 하는 숙제가 정부에 주어졌다. 국익은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는 마지노선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