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한·미 회담, 합의문이 필요 없을 정도라더니

입력 2025-09-12 00:38

성공적 정상회담 띄웠지만
실상은 합의문 없이 난관 봉착

협상 이견 애써 무시하더니
미·일 합의 후 “어렵다” 토로

한국인 구금 사태까지 겹쳐
양국 신뢰 회복 방안 필요

“(협상)합의문이 굳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서로 이야기가 잘 된 회담이었다.”(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 “미국과의 협상이 상당한 교착 상태에 있다.”(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두 발언의 시차는 불과 2주일. 지난달 25일 한·미 정상회담은 순탄하게 마무리됐다. 회담 3시간 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SNS에 한국을 향해 ‘숙청’ ‘혁명’ 등 무시무시한 단어를 올린 뒤의 불안감은 회담 시작 후 훈풍으로 바뀌었다. ‘피스메이커, 페이스메이커’의 정상 간 케미도 좋았다. 강 대변인의 총평이 회담 분위기를 압축했다. ‘3500억 달러 투자와 상호관세·자동차 품목관세 세율 인하(25%→15%)’를 골자로 한 7월 관세협상에 이은 ‘합의문도 필요 없는’ 완벽한 정상회담. 발표대로라면 이재명정부 한·미 관계는 날개를 달아야 했다.

하지만 대변인 말을 곱씹을수록 이상했다. 국가 수반 간 회담에서 합의문이 없는 게 정상인가. 성공적 회담이면 “조그만 이견도 없어 합의문 작성이 순조로웠다”고 표현했어야 했다. 합의문뿐이 아니다. 공동발표나 기자회견도, 심지어 호스트(트럼프)의 배웅도 없었다. 그 찝찝함이 영 꺼림칙했다. 실체는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정상회담 다음 날 트럼프 대통령이 “디지털 시장 규제를 하는 국가에 대해 관세로 보복하겠다”고 경고했다. 한국을 겨냥했다(폴리티코 보도).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의 디지털 규제 법안 포기를 약속하는 내용을 합의문에 담으려 했으나 우리 측이 거절했다. 여기에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펀드 조성 방안의 이견도 있었다. 지난 9일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 참석한 김 실장은 이를 거론하며 “교착 상태에 빠졌다”고 했다. 이대론 투자 핵심인 마스가(미국 조선업 부흥) 프로젝트도 어렵다고 했다. 이야기가 잘 돼 합의문이 필요 없던 게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초기 우려를 씻은 성공적 면담 정도지 성공적 회담으로 볼 순 없다.

투자 펀드를 어떻게 구성할지는 관세협상 이후 내내 제기된 문제였다. 대통령실은 대출이나 보증 위주로 지원한다고 했다. 반면 백악관은 투자처를 트럼프 대통령이 지정하면 한국이 현금으로 직접 투자하고 수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간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실은 백악관 발표를 정치적 수사로 치부했다. 수익 90% 확보 주장엔 “정상적 문명국가에서는 성립하기 어렵다”고 일축했다. 그런데도 한·미 정상회담을 거치며 서둘러 샴페인을 터뜨렸다. 만년필 선물, 트럼프의 ‘위대한 지도자’ 헌사, 메뉴판 사인을 회담 성공의 상징물로 홍보하기 바빴다. 협상 내용의 의구심은 자축 모드에 묻혔다. 국민들은 양국 이견이 거의 해소된 것으로 봤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주장은 일관됐고 우리가 잘못 짚었다. 지난주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미·일 무역협정 시행 행정명령에서 드러났다. 정치적 수사에 비문명적이라던 미국식 접근이 상당부분 미·일 합의문에 녹아 있었고 우리도 정조준하고 있다. ‘합의문이 없는’ 한국의 자동차 관세가 일본과 달리 여전히 25%라는 걸 많은 이들이 이때 알았다. 한·일전은 스포츠 경기에서만 뜨거운 게 아니다. 일본과의 비교를 통해 대통령실의 장밋빛 홍보가 빛이 바랬다.

김 실장은 당초 3500억 달러 투자를 고리로 한 관세협상 결과에 “우리 기업들이 주요국 대비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게 됐다”고 뿌듯해 했다. 그런데 토론회에선 “외환시장에서 1년에 조달할 수 있는 금액이 200억~300억 달러 정도다. 3500억 달러는 경제에 너무 큰 충격”이라고 입장을 바꿨다. 뻥카(현금 투자, 수익 90% 미국 귀속)가 실제 패로 드러나자 ‘현타’가 온 듯했다. 하지만 이는 국가간 협상에서 대비가 철저하지 못했음을 자인한 셈이다.

미·일협상이 행정명령으로 완료된 날 조지아주의 한국인 근로자 300여명이 구금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3500억 달러(기업 투자액 포함할 경우 5000억 달러)를 미국에 쏟아붓기로 했는데 돌아온 건 마약조직, 테러조직 다루는 듯한 폭력적 단속이다. 한·미협상 부진과 근로자 구금을 곧바로 연결시키는 건 무리일 수 있다. 다만 대통령실이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의 신뢰가 공고해졌다던 발표는 이제 믿기 어렵게 됐다. 너무 잘 된 회담의 허점이 숭숭 보이고 있다. 헛바람 빼고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다. 무엇보다 앞으로는 국민에게 솔직해야 한다.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